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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한국의 여배우들

천의 얼굴로 스크린을 홀리다, 도금봉

천의 얼굴로 스크린을 홀리다, 도금봉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2탄 도금봉 

  

한국 영화사에는 대단한 여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배우들의 업적은 폄하되거나 잊혀져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적다. 50년대 말부터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수많은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온 김수용 감독의 인간적인 시선과 생생한 기억으로 여배들의 자취를 되살려본다. 여성신문사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그리운 여배우' 연재가 우리나라 여배우사의 귀중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삼청공원 입구에 유명한 복집이 있었는데 옛날 악극단 배우가 운영하고 있었다. 도금봉과 그 사이엔 아들 쌍둥이가 있었는데 나는 본 일이 없었다. 다만 영화 일이 뜸해진 후 오랜 별거생활을 끝내고 남편한테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금봉도 보고 복국도 먹을 겸 그 집에 갔다가 예기치 않은 대우를 받은 일이 있다. 식당은 비어 있었는데 주방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나오다가 주춤하고 섰다. 나는 도금봉의 어머니로 알았는데 그는 도금봉 자신이었다. 말없이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무표정했으며 앉으라는 말 한 마디가 없다.

 


◀영화 <물망초>의 도금봉 ©한국영상자료원

 

 


1959년 감독으로 데뷔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나는 <청춘배달>에서 도금봉을 처음 만났다. 악극단 출신인 여배우는 아직 청초했으며 대사가 정확하고 연기력도 좋았다. 이예춘, 김진규와 공연했으며, 주연하는 최지희보다 눈에 띄었다.

 

 

그 후 내 영화에는 도금봉 역할이 많아 늘 얼굴을 맞대게 되었으며 세월의 변천에 따라 의상과 화장이 요란하게 변했다. 종반에 촬영한 <토지>에서는 조선 말기의 시골양반집 이야기인데도 아이셰도가 짙었고 루즈가 눈에 띄었다. 1967 <산불>에서 수십 명의 배우들이 산골마을 아낙네로 분장했는데 그때도 독야청청 얼굴을 두드러지게 다듬고 나와 감독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감독과 함께 그녀의 분장을 용서하며 영화를 봐주었다. 사실 연기의 스타일도 남과 달랐다. 늘 한 옥타브 높은 표현을 해서 오버액션을 면치 못했다. 연극과 영화는 앙상블이 생명인데 그 파괴를 감당하면서도 그녀를 캐스팅하는 것은 왜였을까?

 

 

68년 전옥숙(홍상수 감독의 어머니)이 이끌던 연합영화사에서 <수전지대>를 제작했다. 내 조감독으로 있던 이원세의 동아일보 당선 시나리오인데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안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는데 10여 명의 여배우들과 감독은 서울 왕복이 힘들어 그곳 교장선생 관사에서 투숙하게 되었다. 안방은 도금봉을 좌상으로 남정임 등 여러 명이 잤고, 마루 하나 건너 작은 방엔 신인배우 남진과 내가 잤다. 때마침 장마철이라 우리는 밥만 먹고 잠만 자는 날이 많았는데, 어느 날 도금봉은 나에게 말했다

가수보다 배우가 힘든 모양인지 연기가 영 딱딱해.”

누구?” 

남진이란 애 말이에요. 내가 나긋나긋하게 만들어주고 싶은데 도와드려요?” 하며 나에게 방을 비워달라고 한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돌연 신인배우에게 짐을 싸서 서울로 쫓아 보낸 일이 있다. 세월이 지나 그 영화가 어떤 이야기인지 잊어버렸지만 도금봉의 요구를 못 들어준 일은 생각이 난다.

 

 

19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생긴 이래 한국영화는 오랜 쇠사슬을 끊고 표현의 자유를 얻어냈다. 그러나 우리들의 60년대 과제는 어떻게 하면 검열에서 빠져나가느냐 그것이었다. 나같이 가혹한 검열을 받은 사람은 지금의 감독들이 한없이 부러울 따름이다. <산불>에서 사월이로 나오는 도금봉을 놓고 고민이 컸다. 금욕에서 풀려난 여인의 정사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나는 여배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남배우더러 거기나 깨끗이 닦고 나오라고 하세요.” 

거기?”

촬영하는 날 대나무 밭에서 신영균은 여배우의 도전을 받는다. 도금봉은 남배우의 발을 사정없이 정열적으로 애무하는데 아마도 동서고금에 이런 러브신은 없을 것이며 검열에서도 자를 이유가 없어 아직껏 그 영상은 살아있다.

 

 

지금은 삼청공원 앞에 살던 황정순도 도금봉도 세상을 떠났다. 대여배우들의 대우도 못 받고 조용히 이승을 하직한 그녀들에게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글: 김수용 감독


 

도금봉 1930 인천 출생. 만주 용정의 광명여중 졸업 후 1950년대 '대도회' '청춘부대' '창공' 등의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1957년 <황진이>에 출연하며 영화계 데뷔. 1974년 <토지>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1997년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기까지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 2003년 제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한국영화회고전 섹션에서 '천의 얼굴의 요부, 도금봉' 특별전을 통해 적극적인 주체로서의 여성 캐릭터로 부각되었으며, 사후인 2009년 영화계에서의 활동과 업적을 기려 제10회 여성영화인축제 공로상 수상.

 

김수용 감독 192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50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위로 예편 후 ‘공처가’로 영화감독 데뷔. 이후 50여년 간 109편의 영화를 만듦. 1984년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85년 동경 국제영화제, 아세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제33회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국민원로회의 의원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