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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보라]

단단한 세상에서 여성주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다

절기가 바뀐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되던 습습한 열대야 속에 조금이라도 시원한 부분을 찾아 방바닥을 기던 것이 엊그제였는데, 오늘밤엔 귀뚜라미가 울고 선선한 바람이 나뭇잎을 스칩니다. 덕분에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주제로 대중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2010년의 여름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괜스레 섭섭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에 님을 향해 한 자를 적으려니 손가락이 쉬이 움직여지질 않습니다.


지난 6월 정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사무국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구로문화재단과 함께 대단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름 하야 ‘구로는 예술대학’의 ‘엄청난 영화과.’ 구로문화재단이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문화교육 프로그램에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영화관련 수업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지요. 여성영화제가 4월 본 영화제를 끝내고 나면 전국 단위로 상영회를 기획하여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의 지속적 실천을 도모한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지요? 이 수업 역시 그 실천의 일환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 수업의 진행을 제게 맡겨주었습니다. 덥석 수업을 받아들었을 때는 방학 때 수입이 전무 한 시간강사의 쓸쓸한 현실 상황도 한몫을 하긴 했습니다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여성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그것도 10강 씩이나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설렘이 더 컸습니다. 얼마나 지난한 갈등의 시간이 제 안에서 펼쳐지게 될지, 무릇 수업이란 강사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수강생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문제 등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셈이지요.

수업기획에 대한 첫 회의에서 영화제가 건넨 요구사항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이 강의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임을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10강의 강의를 진행하는 내내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것 역시 이 말이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이 ‘일반 대중’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가 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마무리하면서 점차로 제 안에서 달라져갔다는 것이지요. 처음 제가 상정했던 ‘일반 대중’은 ‘제도권 교육 밖에 있으면서 학문적 용어들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쉬운 언어로 여성영화제의 주제들을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때 ‘쉬운 언어’란 ‘비학술적 용어’였던 셈인데, 예를 들면 ‘주류 이데올로기’란 말 대신에 ‘어떤 낡은 사고방식’과 같은 말을 (아주 정치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사용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기획이 “대한민국 박스 오피스 삐딱하게 보기”였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낯선 여성영화나 독립영화, 혹은 예술영화 같은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지 말고, 가장 익숙한 영화들로 이야기를 풀어가자는 취지였던 셈입니다. 박스오피스 1위부터 10위 안에 있는 영화들을 중심으로, 그 영화가 한국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던지고 있는 화두들을 점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친구>와 <실미도>를 가지고선 영화 속 여성재현, <왕의 남자>로는 퀴어, 그리고 <디워>와 <국가대표>를 통해선 민족주의를 다루는 등의 커리큘럼이었어요. 처음 기획안을 잡았을 땐 이 수업이 얼마나 재미있을지 기대에 차 혼자서 낄낄 거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자아도취라니요!) ‘대중’과의 소통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문제는 첫 수업 시간부터 터지기 시작했어요.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위부터 10위까지 영화를 살펴보면서 <괴물>과 <과속스캔들>, 그리고 <해운대>를 빼고선 포스터에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경우가 <웰컴 투 동막골>의 광년이 밖에 없는 흥미로운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지요. (한번 찾아보세요! 재미난답니다.) 물론 다양한 결들을 가지고 있는 영화를 젠더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편파적인 느낌을 강하게 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강의 주제가 이제까지 무심하게 넘겼던 한국영화의 남성중심성에 대해서 살펴보자는 것이었고 그 커리큘럼이 공유 된 상태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문제가 될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교실에 앉아계시던 몇몇 분들이 표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셨지요. 급기야 한 분은 손을 드시고 이렇게 질문하셨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여성주의적으로 영화를 보실 건가요?” 그리고 아쉽게도 그 분과 표정이 안 좋으셨던 몇몇 분들은 다음 시간부터 뵐 수가 없었답니다. 두 번째 시간에 그 분들이 안 나오셨을 때, 제 기분이 어땠냐구요? 하하하하하. 당황하고 착잡했지요. 무엇을 잘못 했을까,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었구요. 심지어 계속 나오시는 다른 분들이 ‘재미있다’며 친구분들을 더 데리고 오셨을 때에도 제가 ‘실패’한 수강생들에 대한 생각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분명히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일반 대중’은 ‘학술적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성영화제의 성인지적 시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구나, 라구요. (수업에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참여하셨어요. 그 분들이 제가 상상했던 것만큼 이해도가 떨어졌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웬만한 대학생들보다는 월등한 이해도를 가지고 계셨고, ‘강좌 매니아’분들께서는 제가 흉내 낼 수도 없는 수업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셨답니다.)


결정적으로 ‘대중과의 여성주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는 <과속스캔들>을 통해서 10대 여성 섹슈얼리티을 이야기한 강의였어요. 2004년 <어린신부>와 <사마리아>에서부터 더욱 가시화되어 최근 ‘꿀벅지 논쟁’에 이르기까지 점차 노골적이 되어 가고 있는 현재 한국 대중매체의 ‘로리타 콤플렉스’에 대한 문제의식에 대해서 논의하는 자리였지요. 성인들의 10대 성상품화와 단속이라는 이중적 태도를 비판하고, 하나의 가능한 대안으로 10대가 스스로 자신의 성을 재현하는 <생리해주세요>를 상영했습니다. 여성영화제 아카이브에 있는 작품인데 혹시 보셨나요? 정말 기가 막히게 재기발랄한 작품이에요. 10대 여성들이 생리의 불편함에 대해 말하면서 남자들에게 생리대를 ‘채우는’ 재미있는 실험을 하는 작품이거든요. (내용만 들어도 재미있잖아요. ^^) 그런데 그 다음 강의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세요? 수강생이 반으로 줄어버렸어요! 정말 열심히 나오시며 친구분들까지 데리고 오시던 분께서도 더 이상 안 나오시기 시작한 거죠. 나중에야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그 날 수업에 그만 두신 수강생분들이 화가 많이 나셨었대요. ‘10대의 성’이라는 주제 자체가 처음부터 불편하셨던 분, ‘신성한 생리대’로 그런 장난을 치는 것에 화가 나신 분, 그리고 즐기는 영화에 대해서 자꾸 정치적 해석을 가하며 문제의식을 강요하는 것에 지치신 분... 그 과정 안에서 저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던 것 같아요. 여성영화제라는 아름다운 테두리, 연구자 집단이라는 안전한 장소, 그리고 ‘유유상종’ 덕분에 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안일하게 받아들였던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 사실 제가 속한 사회에선 저처럼 ‘대중적인 인간’이 없을 정도인데, 그 현실적인 간극을 저는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제의식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전략/전술’에서 철저히 실패했던 셈이에요. 결국 커리큘럼은 대대적인 수정을 거치게 되었답니다. 이때부터 제 안에서 ‘쉬운 언어’란 ‘비학술적 언어’가 아니라 ‘그분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과 사회인식을 지나치게 불편하게 건드리지 않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전략과 전술의 현명한 취사선택은 바람결을 따라 춤을 출 줄 아는 대나무가 될 필요성을 제가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끝까지 수업에 남아 당신의 생각과 저의 생각을 서로 조율하고, 저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해주신 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 중 한 분은 “동성애를 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저출산으로 나라가 망한다”고 문화강좌에서 동성애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아주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셨던 분도 계셨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열린 마음으로 수업을 ‘참아주셨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제는 동성애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다른 관점’이 제가 꿈꾸는 ‘다른 관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감사했습니다. 여성 뿐 아니라 동성애자를 포함한 다양한 성소수자들을 차별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그에 늘 분노하지만, 이런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온 사람들에게 ‘성인지적 감수성’이 당연한 것인 양 요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제가 ‘참아주셨다’고 표현하는 이유입니다. 일단은 당신의 생각을 재고해 달라고 말하는 이가 던지는 그 불편함을 참아주시는 것만으로, 그런 태도만으로도 세상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더욱 믿게 된 것이지요.


결국 10강의 수업동안 변한 것, 그리고 많이 배운 것은 오히려 저 자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늘 이야기했던 ‘아름다운 여성영화제의 틀’에서만 살 수는 없는 것이구요, 6년간 너무 달콤한 시간을 보냈었던 것이구나, 또 되돌아보게도 되었습니다. ‘구로는 예술대학’에서 ‘엄청난 영화과’ 수업을 진행하면서 만난 많은 분들은,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수업까지 함께 해주시면서 용기와 힘을 주시고, 또 삶에 대한 영감을 주셨던 양선생님, 박선생님, 홍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요즘은 저의 ‘영화 읽기’ 수업에 이어 계속되고 있는 사포 감독님의 ‘영화 만들기’ 수업에 열혈 참여 중이시라고 연락이 왔네요.) 님께 드리는 편지를 다 쓰고 나면, 그 분들께도 안부를 전해야겠습니다.


엘니뇨 탓에 9월까지 덥다는 소문입니다. 올해 봄은 그렇게도 지겹게 춥더니, 올해 여름도 그렇게도 지겹게 덥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여름 더위처럼, 세상은 생각만큼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힘을 얻어 가볼까 합니다. 그 힘을 구성하는 한 부분에 늘 님이 계셨지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릴 날을 기대해 봅니다.


2010년 8월 16일 북한산 끝자락에서 손희정 드림.

손희정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램팀장을 거쳐 10회와 11회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현재 중앙대학교와 순천향대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여성주의로 읽어본 대중문화>(공저/여성문화이론연구소 펴냄)과 번역서 <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바바라 크리드/여성문화이론연구소 펴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