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story는 여성영화제의 역사를 기록한 <_말하다_쓰다>에 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1회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진행된 개막식. 배우 방은진, 여성학자 오숙희 씨가 사회를 봤다
1983년 초, 독일 유학 시절이었다. 나는 장학재단의 소개로 보쿰대학의 한 사회학 교수를 만나러 갔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싶었고, 예술이 사회변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논문 주제로 ‘연극과 축제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쓰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당치 않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연극이나 축제가 사회변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사람들을 위로는 할 수 있겠죠. 축제는 오히려 기존 사회체제를 유지시키는 기능을 하죠. 그건 사실 브레히트도 하지 못했던 일이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왜 나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크게 좌절을 경험하였을까? 내가 너무 거창한 혁명을 꿈꾼다고 생각했을까? 어쨌든 그는 연극과 축제의 기능에 대한 매우 비관적이고도 소극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때는 어떤 구체적 사례를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누가 친구인지 알게 되었고, 그것은 점차 관념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되어갔다. 영화제는 이해와 소통, 만남과 우정, 성찰과 각성의 장이었다. 즐거운 페미니즘, 흥겨운 축제가 나부끼는 공간이었다. 그야말로 나의 내부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났고 우리가 함께 변화하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부드러운 혁명의 장이며 사회 변화를 유발하는 장이었다. 엄청난 변화가 진행된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은 적지만 여럿이 모이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1997년 4월,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시작되었다. 1992년 여성문화예술기획(이하, 여문)이 만들어진 5년 후의 일이었다. 여문은 여성의 시각으로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을 연구, 기획, 제작하고자 만든 단체였는데, 여성적 관점에서 여행을 다니며 우리 문화를 재해석하며 단합을 다지는 여성문화예술 기행, 여성문화예술 세미나, 심포지엄, 워크숍, 예술치료프로그램, 콘서트, 여성미술제, 그 밖에도 여성단체나 시민단체의 행사를 연출, 기획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하였다. 그 중 여문에서 가장 대중적이고도 규모가 큰 사업은 연극이었다. 1992년 늦은 가을, 여문이 처음 시작한 연극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한국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맞게 각색한 것으로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뜨거운 논쟁과 대단한 관객의 반응으로 8개월간 연극은 매일 매진이 되다시피 했다. 당시 연극계에서는 “대학로에 무서운 여자들이 나타나서 대학로의 돈을 다 긁어간다, 돈 방석에 앚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1993년 공지영의 소설을 각색한 두번째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역시 좋은 반응이었다. 1994년 세번째 작품은 미국 작가 바바라 워커의 소설을 각색한 <아마조네스의 꿈> 이었다. 급진적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결혼, 성, 사랑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과거 모계사회에서 미래사회에 불시착한 여성의 눈으로 가부장적 현대사회를 뒤집어보기를 시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당시 연극공연 중에서는 평균 이상이었지만 연극 평론가들의 호평에 반해 관객의 반응은 앞 작품들만 못했다.
어찌되었든 연극 공연으로 인해 우리는 경제적으로 적자가 나게 되었다. 처음으로 큰 고비를 맞게 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관객의 반응도 다른 연극에 비해 떨어진 것도 아닌데……’ 당시 연극계는 스태프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있었지만, 여문은 모든 스태프에게 월급을 주고 있었다. 스태프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는 일, 그것은 여문이 출발한 기본적인 이유였다. 여문을 만들기 전, 나는 여성단체 문화기획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한 후배가 봉천동에서 충정로까지 차비가 없어서 여러 번 걸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돈과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에 나와 함께 여성문화운동을 하는 후배는 차비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운동방식이 비현실적이라 생각했고 독자적인 여성문화예술 운동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계유지를 위한 ‘자기만의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그제야 하게 되었다. 어쨌든 연극 <아마조네스의 꿈>은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불러왔다. 무언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1회부터 인연이 된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만난 이들, 주위에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열심히들 권유했고, 또 열심히들 참여했다. 그들 모두 젊은 날의 열정을 다했다. 조윤주, 김재의, 한승회, 박현미, 윤용순, 김수진, 한데레사, 이순진, 송지호 등 이루 다 이름을 열거할 수가 없다. 부대행사인 ‘여성영화인의 밤’은 상업영화 쪽의 전은영, 최수영이 자발적으로 나섰고, 10회 기념 <텐 텐>의 총괄 피디를 맡은 현경림과 지금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프로그래머 정우정 씨도 출판을 오랫동안 맡아주었다. 1회 포럼 코디네이터로, 경호원처럼 검정 수트를 입고 이곳저곳 출몰하던 김선아 씨는 지금의 수석 프로그래머로 활약하고 있다. 역시 당시에 번역을 맡았던 김영덕 씨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영화계에서 맹활약 중이고, 역시 번역을 맡았던 남인영 씨는 이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집행위원을 겸한 핵심 멤버로 활약 중이다.
사무국장으로 뛰어들었고 영화감독의 꿈을 접으면서 여성영화제 사무국장으로, 프로그래머로, 집행위원으로 지금가지 일하고 있다.
10회야 비로소 <텐 텐>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으니, 그녀로서는 참 많이 돌아온 셈일 게다. 다른 장르의 여성문화예술기획 회원들도 열심히 참여했다. 연극연출가 문성희 씨는 개/폐막식을 연출했고, 박영숙 씨가 소개한 윤동경 씨도 개막식 퍼포먼스 연출에 힘을 썼으며 어려운 경제형편에도 꿋꿋이 버텨준 정승연 씨가 회계 살림을 맡아 애썼다. 무엇보다 싫다는 추진위원장을 억지로 맡아주신 윤석남 선생님은 영화제 종자돈 마련을 위해 아끼시던 그림 20점을 내놓으시기도 하였다. 1996년 12월 그렇게 해서 여성문화예술기획은
영화제 종자돈 1,500만 원을 마련했고, 1997년 1월 회사로 독립해 나간 페미니스트 저널 'IF‘ 의 출발에 그 이름을 선물함과 동시에 500만 원도 보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안팎에서 함께 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자기 일처럼 뛰어준 이현승 감독, CJ의 후원을 주선하려 애쓴 박철수 감독 그리고 중앙대학교 영화학과의 주진숙 교수, 동국대학교 영화학과의 정재형 교수, 김경욱 평론가, 박종원 감독, 임순례 감독은 기꺼이 1회 단편영화 및 비디오 경선 심사위원을 맡아 주었다.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부터 지금까지 뒤에서
애써준 박미해, 박영숙, 홍성혜, 김경희, 안혜경, 박혜숙, 안미라, 서소은희 등과 여성문화예술기획 식구들 그리고 늘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나의 남편 양길승. 모두 감사한다.
10주년 기념제작프로젝트 옴니버스 영화 <텐텐> (개막작)
서울 여성 행복 울리케 오팅거
허즈 앳 래스트 헬렌 리
20세기를 기억하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방법 변영주
래빗 이수연
데이트 장희선
드라이빙 미스 김옥분 임성민
어디 제1회 여성영화제를 열기까지만 함께 했던 사람들뿐이랴! 시작과 더불어서 1회와 2회를 이끌어준 사무국장 임성민이 있었고, 1회와 2회에는 쿠션을 들고 다니며 열혈 관객으로 참여했던 김혜승, 그녀의 능력과 사람됨에 반한 나는 갑자기 커져버린 제3회 때는 사무국장을 맡겨 버렸다. 그 후 그녀는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다가 남들이 말하는 다 늦은 나이 50이 되어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뉴욕 영화아카데미에서 수학 중이다. 어린 딸을 두고 사무국 꾸리기에 바뻤던 4회 김소연 사무국장, 연극학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막 돌아왔던 이병희는 5회 사무국장을 거뜬히 치러내고 6회를 준비하다 그만 병이 나 버렸다. 현재 10회 사무국장인 김태선은 1회부터 꾸준히 일했던 토박이로 6회,7회,8회의 사무국을 맡아 운영했다. 그녀 때문에 너무너무 든든하다. 그리고 9회 사무국장 임우정은 지금도 영화화진흥위원회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어디 사무국장들뿐이랴! 2회부터 일했던 소리없이 차분하게 그러나 늘 웃으며 뒷바라지를 하는 도은정 씨는 그 어떤 일에도 자신의 능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그래머 임성민, 권은선, 남인영, 주유신, 김선아, 최선희, 손희정 그리고 객원 프로그래머 사이토 아야코의 얼굴도 다시 떠오른다. 김소영, 변재란, 김은실 교수는 영화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의 역할을 일찍이 접고, 2회부터는 책임감과 함께
무거운 논의를 도맡아 할 수 밖에 없는 집행위원을 맡아 고생들을 많이 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영화제가 이렇게 중심을 잘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8회부터는 여성영화인모임의 대표 채윤희 씨도 합류했고(실제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여성영화인과의 연대를 위해 이는 매우 뜻깊은 일이다), 임순례 감독도 항상 유연하고 성실하게 중심을 잘 잡아주며 힘을 실어 주었다. 10회 때 합류한 김영 PD, 변영주 감독은 언제나
어려운 순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함께 해주어 모두들 너무 고맙다.
이렇게 함께 해왔던 많은 이름들을 열거한 것은 무엇보다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다 말하지 못한 수많은 스텝들, 자원활동가들, 후원회원들, 후원해 준 기업,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그 과정에서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 오늘의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우리 모두의 협력의 결과이며 작품이다. 종종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 회의, 프로그램 회의 등은 매우 ‘까칠’할 때가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은 학교 일, 영화 일 등으로 바쁜데 게다가 영화제 일까지…… 그래서 늘 회의는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한 논쟁과 긴장의 시간들이 된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함께 한 모든 이들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힘이고, 또한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다.
- 이혜경,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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