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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SIWFF]

주변에서 아시아 영화를 묻다_부산영화포럼 리뷰



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는 올해 '부산영화포럼(BCF)'이라는 국제학술대회를 신설했다. 영화산업 및 미학에 대해서 마켓 운영이나 영화제 프로그래밍뿐만 아니라 학술적 담론 형성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부산영화제의 야심찬 기획이다. 제목은 <21세기 아시아 영화의 길을 묻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1996년 제1회가 개최될 때부터 부산영화제의 관심사는 단연 아시아 영화였고 그 지향점 역시 '아시아 영화의 허브'임을 생각해 보면, 본격적으로 시작된 부산영화포럼이 '당대의 관점에서 아시아 영화의 나아갈 바를 점검하겠다'고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부산영화제가 걸어온 역사와 겹쳐지는 그 기간 동안 '아시아'라는 화두는 국내외 영화학계의 담론을 주도하는 한 축이었기 때문에,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도 인구에 회자되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거기다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봉준호, 홍상수와 같은 아시아 스타 감독과 더들리 앤드류, 데이비드 데서 등의 '아카셀렙'이라 부를만한 세계적인 학자들, 그리고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세계적인 영화 잡지의 편집장이 줄줄이 방문했으니, 어찌 보면 흥행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보증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술대회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기조발제로 그 문을 열었다. 그는 21세기 인간의 존재론을 완전히 바꿔버린 디지털 매체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상시적으로 네트에 접속되어 있는, 유전자 배열이 완전히 다른 신인류의 등장은 영화를 유통하는 방식 뿐 아니라 영화를 사고하는 방식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이때 영화는 정치적 변혁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혁명적 매체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는 '해적판'이 유통되는 경로를 역이용해서 자신의 영화를 배급한 태국의 한 영화감독의 예를 들면서 '해적판 유통시장'은 영화의 합법적 유통 경로와 함께 디지털 시대에 공존할 수밖에 없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서는 "해적판 시장은 자국 영화 산업의 건강을 위협한다" 등 몇 몇 학자들의 근거 있는 반론이 있었지만, 꽤 흥미로운 관점이었다. 두 번째 기조발제를 맡았던 더들리 앤드류의 경우에는 그런 신인류의 존재론이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면서, 언제나 네트에 접속해 있기 때문에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따라서 감독이 선사하는 영화적 시간을 따라오지 못하는 혹은 따라오려 하지 않는 젊은 관객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영화는 한 프레임 안에서 다양한 레이어를 통해 다층적인 시간 및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21세기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다양한 시간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지아장커의 영화 미학은 매우 흥미로우며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객석에서는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이 공존하는 것은 지아장커만의 새로운 미학이 아니라, 전일적이고 폭압적인 근대를 경험하고 있는 아시아 자체의 시간 개념"이라는 문제제기가 나오기도 했다. 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영화의 미래에 대해서 정치, 사회, 문화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기술과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고민해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기조발제는,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그 나름의 고민의 깊이가 느껴지는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여했던 몇 개의 섹션 중 가장 많은 고민거리를 남겼던 섹션은 카이에 뒤 시네마 섹션이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대 및 현재 편집장 세 명과 정성일, 허문영 평론가가 참여했던 이 자리에서는 카이에 뒤 시네마가 한국의 어떤 감독에게 주목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봉준호와 홍상수가 가장 주목할 만한 감독이고 여타 김지운, 류승환, 박정범 등의 감독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으며, 박찬욱, 김기덕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다만 통역의 문제였는지, 카이에가 그 감독들에게 주목하는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많이 아쉬웠다. 그러던 중 카이에 쪽에서 한국의 '대표 평론가'들에게 한국에서는 어떤 감독이 가장 인정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허문영 평론가는 자신만만하게 "한국의 평단에서는 만장일치로 홍상수를 가장 뛰어난 감독으로 꼽는다"고 대답했고, 카이에는 자연스럽게 그 발언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였다. 이 순간 개인적으로 몇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홍상수가 한국의 가장 뛰어난 감독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가? 적어도 나와 내 주변의 영화학자 및 평론가들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를 '만장일치'로 꼽는다는 '그 평단'은 누구인가? 주류 저널에서 비평을 하는 한정된 몇 몇만의 의견을 바탕으로 한국의 평단을 저렇게 당당하게 획일화 할 수 있는가. 혹 그럴 수 있다면, 한국 영화계가 직면한 이 저열한 평단의 두께를 영화 주변인으로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저 발언이 그대로 프랑스로 옮겨져 '진실'로 재생산되는 것처럼, 카이에를 비롯한 서구 평단의 어떤 편협한 시선이 한국으로 그대로 옮겨져 '진실'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이 머리속에 떠오르는 순간, 하나의 지루한 커넥션이 형성되는 현장을 목격한 느낌이었다.


국에 소개될 수 있는 라인을 가지고 있거나 그 커넥션 안에 포함되는 몇 안 되는 한국 감독의 작품들이 해외시장에 소개되고, 그 안에서 그들의 구미에 맞추어 평가되며, 때로는 한국 최고라는 평가를 얻는다. 그때 그것을 '평가'하는 이들의 위치와 입장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론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면 국내에서는 해외의 그 담론은 그대로 수입해서 또다시 그 감독에게 '최고'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이 흐름 속에서, 소수의 영화이거나, 올라탈 수 있는 라인을 가지지 않았거나, 해외 평단의 구미에 맞지 않았거나, 혹은 한국의 몇 몇 영향력 있는 평론가의 눈에 띄지 않은 영화는, 그러나 훌륭한 영화는 어떻게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 속에서 해외 시장에 팔리기 위해서 '극도로 저열한 아시아의 어떤 이미지'를 내면화하면서 획일화되고 있는 '한국의 어떤 영화들'에 대해서 또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어졌다. 더불어서 여성영화제처럼 대안적인 영화를 발굴해야 하면서 동시에 주류에 편입되려는 욕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소수 영화제의 역할과 나아갈 바에 대해서도 풀리지 않을 고민이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런 의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섹션은 "동남아시아영화학회" 섹션이었다.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의 사회적 상황과 영화 및 영상매체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신진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의식과 학술적인 관심사를 열정적으로 연결하여 내놓은 연구 성과를 볼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격동기를 겪고 있다는 현실 정치의 유사성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지점도 많았다. 이 섹션과 카이에 섹션 사이를 비교해보면서, '아시아' 혹은 '동아시아'에 대해서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동/아시아를 상정함에 있어 이 개념이 단순히 지리적 경계를 바탕으로 또 다른 1세계를 꿈꾸는 배타적이며 경제적인 개념이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위해 때로는 닫히고, 때로는 열리는 유연한 개념으로서 동/아시아는 지금과 같은 세계화 정세에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시아 여성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성영화제 역시, 이런 부분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손희정 (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