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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데일리

[EVENT] 바리터 30주년의 의미를 말하다

"우리끼리는 누구보다 자유로웠고, 누구보다 래디컬다"

스페셜 토크: 바리터 30주년의 의미를 말하다

 

빨래터파리떼가 아니다. 대한민국 설화 속 여성 영웅 바리데기가 모인 ’, ‘바리터는 최초의 여성영상집단으로 변영주 감독, 김소영 교수, 김영 프로듀서 등 걸출한 영화인의 산실이 되었다. 2019, 이제는 젊은 여성들이 모여 작당을 하는 페미니스트 코뮌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30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나던 시절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바리터결성 30주년을 맞아 첫 작품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김소영, 1990)를 상영하고 창립 멤버와과 20세기를 회고하는 스페셜 토크 바리터 30년 이후, 그 의미를 말하다를 마련했다. 김소영 감독, 변영주 감독, 서선영 작가, 김영 프로듀서, 권은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도성희 교수가 자리했다.

권은선  이 영화를 30년 만에 봤습니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먼저 바리터가 어떻게 창립되었는지 이야기해볼까요?

 

변영주  제가 경인 지역 여성 노동자에 관한 영화를 너무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페미니스트김소영 감독님을 소개받았고, 김 감독님의 후배들, 영화과 대학원 학생들, 그리고 서선영 작가 등이 모였습니다. 충무로에 깐느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거기서 여성들이 의기투합하며 영화에 관해 신나게 이야기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 한 평짜리 사무실을 얻어서 술을 먹고 놀던 것이 바리터의 시작이었습니다.

 

김소영  여성의 고난을 상징하는 가장 오래된 서사 중 하나가 바리데기이야기입니다. 버려진 아이였지만 나중에는 부모를 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이룬 영웅이죠. ‘바리데기에 여성이 모이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를 더해 바리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많은 남성은 빨래터라며 폄하했죠.

 

서선영  저희를 놀리던 말로 파리떼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 우리는 그 농담을 즐기기도 했고요.

 

권은선  저는 바리터의 막내로, 마냥 언니들이랑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눈치 안 보고 담배피고, 여자 선배들이 항상 그곳에 있고, 술 마시고 너무 좋았어요. 생활공동체라는 측면에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죠.

 

도성희  <작은 풀에도 이름 있느니>를 만들고 벌써 한 세대가 지나갔네요. ‘빨래터파리떼같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영화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지금과 아주 달랐습니다. 충무로에 위치한 영화사에 소개를 받아 찾아갔는데 양갓집 규수처럼 보이는 사람이 왜 이런 데를 왔냐고 하더군요. 버텨보겠다 결심했지만, 자꾸 남성 기자들이 카바레 가서 춤이나 출까?”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여성들끼리 영화를 하겠다고 모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남들이 뭐라든 끝내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모여 바리터가 된 것 같습니다. . 팔자인 것 같네요. (웃음)

 

김영  안녕하세요. 준회원이었던 김영입니다. 대학 시절 영화 서클에서 활동했는데, 남자 선배가 대다수였고 저와 공감을 이루는 사람이 적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변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던 모습을 보고 기웃기웃하다가 참여하게 됐습니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에 등장하는 주인공 딸 영주라는 아이는 실제로 제 조카입니다. 차마 부모한테는 말을 못 하고 거의 납치를 하다시피 해서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가 다음 주에 결혼합니다. (웃음)

 

김소영 감독

권은선  오늘 함께 다시 본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요?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여성민우회와 협업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진 영화이지요?

 

변영주  바리터는 애초에 영화를 정말로 만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친목 모임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당히 유명했던 독립영화단체 대표가 서선영 작가에게 , 바리터 너희도 무슨 사업이라도 하려면 재정지원이 필요하지 않냐? 여자들이 모였으니 술집이나 해!”라고 한 거예요. 흑석동에서 이대 앞까지 서 작가가 울면서 걸어온 모습을 보고 정말 분노했습니다. “, 우리가 좀 더 독해져서 무언가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때 여성민우회가 600만 원으로 여성 노동자 교육용 영상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해왔고 이후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가 만들어진 거죠.

 

김소영  예. 제가 연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촬영감독을 장산곶매의 이영배 감독이 해주기로 했는데, 촬영 중에 갑자기 장산곶매 회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 <파업전야> 찍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냐!”면서 우리한테 여자들이 말이야~” 어쩌고 하는 말도 잔뜩 하고 갔죠.

 

변영주  저는 이전에 스틸 카메라 한번 잡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촬영감독의 포스가 있다라는 이유만으로 16mm 카메라를 들고 촬영감독이 되었습니다.

 

서성희  그때 당시에는 여성 사무직 노동자를 다룬다는 것에 내심 부끄러움을 가졌습니다. 지금까지도 회자하는 <파업전야>(장동홍, 1990)는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잖아요. 요즘은 직장 내 성평등과 성희롱이 너무나 중요하고 와 닿는 주제이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아웃사이더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김소영  여성 사무직 노동자라는 존재가 이제 막 등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여성영상집단 바리터는 여러 층의 압력을 받았습니다. “웬 여성?” 그리고 웬 사무직?”이라는 압력이었는데요. 우리와 뜻을 함께할 동지가 드물었지요.

 

변영주  페미니스트가 모여 만든 바리터는 누구보다 좌파이고 그 자체로 독립영화 집단이었지만,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말이죠. 그때 독립영화를 했던 사람을 지금 다시 보면, 여전히 우리가 가장 좌파고 인디니까요. 어째서 우리는 언제나 증명하려고 했을까? 저는 바리터활동에 어떤 후회도 없지만, 딱 하나 후회가 있다면 그것입니다.

 

권은선  토픽을 전환해 볼까요. 1990년 민우회에서 열린 <작은 풀에도 이름있으니> 첫 시사회에서 한 사무직 여성이 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울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서성희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작 저는 영사기와 필름을 직접 들고 대학교 축제를 돌면서 배급했던 기억이 쓸쓸하게 남아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직장 내 성차별 이슈가 누구나 공감하는 주제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은 분이 와 주셨다는 것이 놀랍고 반갑습니다.

 

권은선 중부대학교 교수
서선영 작가

변영주  당시 한국영화는 제작 신고를 국가에 해야 했어요. 따라서 모든 독립영화는 불법이었습니다. 만들고 보여주는 행위 전체가 불법인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연출님은 16mm 카메라를 처음 잡아본 제게 화 한번 안 내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영주야, 이거 할 수 있겠니? 힘들겠지? 그렇지?” 라면서요.

 

김소영  단 한 번도 화를 내 거나 투덜거린 적이 없습니다. 돈타령도 안 했습니다. 그렇게 버티는 것이 끝내 해야 할 일이었겠지요. ‘급진적 여성주의자가 존재하지도 않을 것 같던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우리끼리는 누구보다 자유로웠고 누구보다 래디컬했습니다. 그런 모임에서 만든 몇 편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 덕분에 지금 즐겁게 회고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관객 여성 영화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후배들을 위해 조언해주신다면.

도성희  저희는 <귀부인과 승무원>(리나 베르트뮬러, 1974) 같은 외국영화도 함께 많이 봤어요. 당시 한국에는 시대가 규정하는 것들이 많은 동시에 깨고 나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이제 다양한 생각과 미학을 온전히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때가 왔다!”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요즘은 핸드폰으로도 영화를 찍는 등 접근 방법이 늘어났다고 봅니다.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창작을 하고 나면, 여러 독립영화제 등을 통해서 이전보다는 작품을 공개할 기회가 좀 더 많아지지 않았나 싶어요. 조언이라고 한다면, 어떤 내용이건 당신이 본 그대로를 표현하세요. 그렇다면 다양한 모습이 담긴 영화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서성희  저는 바리터에서 행복했고 즐거웠고 자유로웠습니다.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곳에서는 굳이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좋아하는 곳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즐겁고 힘 있게 해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영화의 장르와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권은선  이제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저희는 바리터 30년 이후, 그 의미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모였습니다. 김소영 감독님이 바리터가 남긴 의미를 말씀해주시면서 마치면 좋을 것 같아요.

 

김소영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작품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워크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저희의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여러분이 와주셔서 가장 큰 관객을 만난 것 같네요. ‘바리터는 영화로 가는 하나의 페미니스트 코뮌이었습니다. ‘바리터가 지닌 정신이나 유산을 나누고 싶었어요. ‘페미니스트 코뮌을 만들어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던 점을 여러분이 함께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1926년도 영화죠?” 

변영주 감독은 자조 섞인 농담을 던졌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적은 예산에 16mm 카메라로 촬영되었고, 필름을 온전히 복원하지도 못한 채 30년 전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21세기의 관객들과 만났다. 한 관객은 극장을 나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왜 자꾸 워크숍이라고 낮춰서 말씀하시지? 완전히 요즘 얘기잖아!”

 

 


 

#미투 운동과 #00_여성혐오_고발, ‘동일임금 동일노동2016년 이후 밀려온 한국 페미니즘 파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자리 잡았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제작 당시 뭘 그런 걸 만들고 있느냐며 비난받았던 작품이지만, 현대 여성 관객에게 이토록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페미니스트 영화인의 코뮌 바리터의 존재는 여성 후배뿐만 아니라, 각계에서 버텨나가는 수많은 여성에게 <캡틴 마블>(애너 보든, 라이언 플렉, 2019) 못지않은 임파워링을 주었으리라 믿는다.

 

<전시: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될 때> 앞에 선 바리터 창립 멤버들

 

 

글  선채경 자원활동가

사진  조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