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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보라]

구로동에서 만난 아트 패밀리와 함께 한 <굿 닥터>



1. 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사)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온 전화를 받고, 구로문화재단에  강의 프로그램과 프로필을 제출한 적이 있었다. 이후, 한참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다가 늘 그러듯이 갑자기, 번갯불에 콩구어 먹듯이 연락이 왔다. ‘2010 지역사회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지원 사업-<구로는 예술대학>' 프로그램을 7월부터 10월까지 진행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굿거리장단으로 가다가 갑자기 휘몰이로 바뀌더니, 실무자 미팅과 회의가 진행되고, 마침내 (사)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함께 강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영화 리터러시 강좌와 영화제작강좌가 이어지고 난 후, 연극 강의를 해야만 했다. 고민스러웠다. 연결점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두 가지. 첫째, 영화와 연극 속 주인공, 나도 될 수 있다는 것. 언제까지 관객이자 시청자, 문화소비자로 머물 것인가? 일상 속에서 접하게 되는 인생의 진실에 대한 발견과 포착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둘째, 여성주의 시각을 가지고 영화를 읽어내는 수업도 받았고, 처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경험도 해보았는데……. 그렇다면 감독은 연기를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자신이 직접 연기를 해보는 것일 게다. 어쨌든, 나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강좌 제목을 <구로동 햄릿&줄리엣>이라고 붙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앞의 두 강좌가 잘 진행되었다는 좋은 소식과 그동안 실무를 해오던 담당자가 사직하게 되었다는 당황스런 소식을 접하며, 구로아트밸리 소강당을 찾았다.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에서 70대 할머니, 예쁘고 어린 딸과 함께 온 주부, 서로 잘 어울리는 듯 보이는 젊은 커플(?)등 다양한 수강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모노드라마 하듯이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반전. 나는 정말 놀랐다. 마음을 열고 자신의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는 이야기들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는 그들에게. 그 순간, 내 마음도 활짝 열렸고 우리는 구로동 아트 패밀리가 되었다.


2. 열정의 피드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수업 시간보다 30분 먼저 강의실에 도착하면, 세 사람이 늘 나를 반겨주었다. 어린 딸을 데리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한 재영씨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70세 양 선생님. 우리는 일상 이야기도 주고받고, 얼마 전에 찍었던 영화 이야기도 하고. 이 강좌에 오게 된 사연도 듣고. 수업에 관련된 소감도 나누면서 짧지만 달콤했던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보면 넷, 다섯..여덟 아홉, 자리가 차고 강의를 시작했다. 세시간이 거짓말처럼 훌쩍 흘러가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자문해보았다. 대체 왜 힘이 나는 걸까?
분명히 강의하면서 에너지를 다 썼는데.......

3. 구로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즉흥극을 해보았더니 연기와 연출, 작가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뿐만 아니라 음악을 전공하는 수강생도 있어서 공연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정해진 강의시간에만 준비하기에는 절대치의 시간이 부족했다. 고민. 나름대로 여성주의 시각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면서, 최대한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서 완성 가능하고 접근이 쉬우면서도 재미있는 작품이 없을까? 극의 길이도 적당하게 짧고 주제의식이 살아있는 입에 딱 맞는 그런 작품. 원래 하려고 했던 훌륭한 희곡을 포기하는 마음은 무진장 아팠지만, 실제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행히 찾아냈다. 닐 사이먼의 <굿 닥터>. 바로 각색에 들어갔다. 지금의 현실을 담아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구로동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켜야만,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흥미로운 법! 세 개의 에피소드를 골라서 진행했다. 3명씩 짝을 지어 세 모둠이 만들어졌고, 그들은 마침내 한 배를 탔다. 대본을 완성하고, 배우선정과 스텝구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첫 번째 암초는 대본암기. 얼마 남지 않은 공연일자까지 대사를 다 외울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처음 서보는 무대 위에서 어색하고 긴장되는 상황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걸음걸이, 손의 처리, 시선문제 등등. 넘어야할 바위는 많고도 많았다. 그렇지만 앞의 영화 강의를 들으면서, 혹은 만들면서 축적된 팀워크와 경험 덕분에 순항할 수 있었다.


<그럴수도 있다>팀 (오른쪽 위) <물에 빠지다>팀 (왼쪽 위) <오디션>팀 (오른쪽 아래) 팀별 리허설 (왼쪽 아래)

4. 막이 오르고, 그들에게서 빛이 났다

<구로-굿 닥터>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떨리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진지하고 아름다웠다. 연극이 끝난 후, 나는 물었다. 어땠냐고?
대답은 조금씩 달랐지만, 나는 보았다.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진 그들의 빛나는 모습을. 고민을 말할 때 울면서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밝고 적극적이고 자신감으로 충만하다니. 이것이 해 본 사람만이 느끼는 연극의 힘! 나의 패밀리들을 꼭 껴안으며, 나도 속으로 울었다.

5. 지금, 그들이 많이 그립다
한 달이 넘었다. 바람결에 구로동 마을축제에서 공연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위로 3분마다 전철이 지나가는 고가 아래에서 연극을 하는데도 그 어마어마한 진동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서 연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바로 그때, 내 눈앞에 얼굴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꿈을 꾼다는, 어릴적 활달하고 유쾌했던 모습을 찾아서 기쁘다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너무도 좋다는, 겪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아보아 행복했다는, 모두 하나되어 하는 연극에 푹 빠진, 빡빡한 일상 속에서 작은 빛을 보았다는, 35년 동안 알고 있었던 연극의 정의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니 너무 아쉽다는 모습들이 마치 홀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 문성희 (연극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