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한 달 동안 지역순회상영프로젝트 'gogo시네마'가 충남을 비롯 태백, 부천, 아산, 의정부 등 12곳에서 여성영화를
상영하는 나눔상영회를 열었습니다. <땅의 여자>부터 <미쓰 홍당무><어떤 개인날> 등 여성영화제에서 상영했던 화제작과
<레인보우><날아라 펭귄><서울의 지붕 밑> 등의 영화들이 지역 관객들을 찾았고 영화 상영 후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글은 태백에서 진행된 상영회 후기입니다.
지난 뉴스레터의 <땅의 여자> 연기군 상영 후기에 이어 이번에는 태백의 <레인보우> 상영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장편 데뷔작 <레인보우>로 떠오르는 신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신수원 감독님은 추운 날씨와 먼 길에도 불구하고 공주, 원주, 태백에서 이뤄진 3번의 관객과의 대화에 모두 참석해주셨습니다. 지역에서는 독립영화를 볼 기회가 많이 없거니와 영화를 만든 감독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도 많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관객들은 진지하게 대화에 참여해주셨습니다.
낙동강 발원지인 태백(좌) 싸고 맛있었던 태백의 물닭갈비(중간) 태백문화예술회관 앞 전경(우)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수많은 간이기차역을 들르며 태백까지 가는 길은 어느새 KTX의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있던 저에게 새삼 기차여행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태백까지 가는 길은 출장이라기보다는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처럼 설렜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태백은 이국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아담하고 소박한 도시였습니다. 이번 ‘gogo시네마’ 지역 상영을 책임지고 진행했던 김명혜 아카이브 팀장님, 권나미 씨와 함께 첫날 임순례 감독의 <날아라 펭귄> 상영을 무사히 마치고, 다음날 <레인보우> 상영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독립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지역민들의 참여가 저조하지나 않을까, 생소한 독립영화를 잘 이해해주실까 걱정했지만 기우였습니다. 10대부터 60대까지 매우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은 영화 장면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마음껏 영화를 즐겨 주셨습니다.
<레인보우>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들(좌) 영화감독이 꿈인 관객(중간) 진지한 관객들(우)
<레인보우>는 익히 알고 계시는 것처럼 무지개 넘어 저기 어딘가에 있는 ‘꿈’을 잡고자 고군분투하는 한 영화감독의 입봉기입니다. 신수원 감독님 역시 영화 주인공 지완처럼 안정적인 교사생활을 뒤로 하고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 하나로 뒤늦게 영화판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코미디와 판타지 장르 안에서도 현실적인 진정성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감독님 말씀처럼 이 영화에서 코미디와 판타지는 장르를 위한 장르가 아니라 현실성과 공감을 위한 효과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시나리오 작업 중 노트북 커서가 개미로 바뀌는 환상 장면에 많이들 공감하고 재미있어했습니다(영화 속 개미는 예산상 CG가 아니라 진짜 개미라고 하더군요. 스텝들이 개미를 잡고 연기를 시키느라 많이 고생했다고 합니다. 특히 감독님은 영화를 위해 죽은 개미들에 많이 미안해하셨습니다-_-).
<레인보우>는 개인의 성장영화이지만 또한 매우 사회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민망해 하고, 꿈꾸는 사람들을 루저라 부르면서 꿈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외침이기도 하죠. 그래서 영화는 주인공의 꿈 쫓기에만 열중하지 않습니다. 영화 만들기를 꿈꾸는 엄마, 음악에 빠진 사춘기 아들, 젊음과 열정 하나로 꿈을 실현시켜 가는 인디밴드 등 나름의 힘든 조건 속에서도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와 다양한 장르가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환상적으로, 때로는 묵직하게 무지개처럼 엮입니다. 그 중에서 주인공의 사춘기 아들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사춘기 소년스러운 냉소와 엉뚱함, 퉁명함과 음악에 대한 고집이 절묘하게 결합된 너무나 사실적인 연기에 많은 분들이 궁금해 했습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님은 시영 역을 맡은 백소명 군을 캐스팅한 비화를 말씀해주셨습니다. 2007년 SBS 예능 프로그램 <스타킹>에서 초등학교 밴드로 활약했던 것을 보고 중학생이 된 백소명 군을 캐스팅했다고 하더군요. 어린데도 불구하고
관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신수원 감독(위) 확고하게 꿈을 키워나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도 실제 기타실력을 뽐내었음은 물론이고요.
이 영화는 주인공 지완을 닮아 앞심보다는 뒷심이 센 슬로우 스타터입니다. 답답하고 미련할 정도로 일이 잘 안 풀리고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던 지완은 결국 한순간에 펑하고 터집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관객들이 가장 크게 반응을 하는 장면은 지완이 후배 감독의 현장에서 우연히 지나가는 행인으로 캐스팅되어 계속해서 뺨을 맞던 장면입니다(감독님은 도쿄영화제와 같은 해외영화제에서도 이 장면에 가장 크게 반응한다고 하더군요. 노인 관객이 대부분이었던 공주문화예술회관에서도 관객들은 지완이 뺨을 맞을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재미있어 했습니다). 관객들은 이 슬랩스틱스러운 장면에서 아파하면서도 통쾌한 사도매저키스트적인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던 지지부진한 앞의 이야기들 때문에 오히려 이 장면에서 더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가장 감동스러웠던 장면은 신수원 감독과 비슷한 연배의 어떤 여성 관객이 본인도 꼭 자신의 영화를 찍고 싶다고 간직했던 꿈을 이야기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관객은 앞서서 꿈을 이뤄가고 있는 선배로서 신수원 감독에게 감사해 했으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측에도 태백 같은 지역에서 이런 상영회나 미디어워크숍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줄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했습니다. 그 분의 요청과 꿈을 꾸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우리가 지역상영회를 하고 있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습니다.
-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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