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story는 여성영화제의 역사를 기록한 <_말하다_쓰다>에 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아줌마,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매표소에 서다
“태희 씨, 저녁에 시간 있어? 신나게 놀아보게.”
놀이가 있다는 얘기가 삭막한 겨울바람을 가르듯이 귓가에 꽂혔다. 같은 모임에 있는 이덕희 선생님의 소개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8회 ‘후원회원의 밤’에 참여하게 되었다. 낯선 사람들 틈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기웃거리고 있을 찰라, 흰 나비 한 마리가 모임 장소를 너울거리며 봄을 아리고 있었다. 그렇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4월은 젊은 여자의 옷차림으로 봄이 시작되면서 또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잔뜩 멋 좀 내리라 작정하고 옷장을 뒤졌다. 마땅한 옷이 없다. 할 수 없이 몇 년 전에 입던 원피스를 꺼냈다. 방충제 냄새가 확 풍긴다. 몇 방울 남은 향수를 뿌렸다. 그래 본들 뭐하나. 냄새는 더 고약하다. 그래도 그나마 몸에 맞으니 다행이다. 걸치고 나니 또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눈가주름에 파우더를 꾹꾹 눌렀다. 지난 봄 마트에서 공짜로 받은 립스틱을 발랐다. 너무 튀면 촌스러우니까 살짝. 보도블록을 깰 듯 소리가 나는 굽 높은 구도도 신었다. 이만 하면 4월의 신촌에 나갈 만하겠지! 날씨도 내편이다. 날개 같은 스카프가 살랑댄다.
“저기 아트레온 극장이 어디예요?”
안내 약도를 보고 왔지만 너무 복잡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아래 위를 훑어보며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킨다. 극장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상영관 앞은 벌써 축제 열기가 가득하다. 먼저 무료로 나눠주는 선물을 받고, 수공예 판매대도 기웃거렸다. 친구와 약속시간이 25분 남았다. 영화 일정표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있어 깊은 호흡으로 들뜬 마음을 다독이며 볼 영화의 시간을 여러 번 확인해 봤다. 그리고 볼 영화의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줄이 엄청 길다. 가장 재밌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매진인데요.”
뭐? 안내원은 인터넷 예약으로 다 끝났다고 말했다. 인터넷! 예약자들이 표를 받기 위해 선 줄이었다. ‘보고 싶어 벼르고 있던 영화인데. 어떡하지.’ 머리를 굴린다. ‘떼를 쓸까? 암표는 없나? 지방에서 왔다고 할까?’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책임지고 예약한다고 했잖아?” “그게… 당연히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몰랐다. “저기요, 매진이어도 안 온 사람 있으면 대신 들어갈 수 없나요?” “힘든데요. 상영시간이 지나야 알 듯 한데……” “그럼 다른 영화 추천 좀 해 주실래요?” “이 영화는 아프리카 여성 감독이 만든 건데요.” “제가 보려는 영화는 내일 시간 예매할 수 있나요?” “예. 잠시만요……”
이럴 땐 있는 컴퓨터도 활용하지 못하는 바보 같다. 영화상영 10분전. 상영관 앞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기대하던 영화가 아니라 그런지 보는 사람도 적어 보이고, 보려던 영화를 못 봐서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 밤의 진실>(판타 나크로, 2004). 둥둥둥, 영화는 힘찬 북소리와 함께 시작했다. 북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자기를 버리고 군중의 심리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전쟁으로 서로 죽고 죽이면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죽인 상대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다. 북소리만 들으면 미쳐가는 군인들과 아들의 죽음을 직접 지켜봤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던데…… 그런 어머니가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어머니는 용서를 할 수 있었는가? 용서를 해야 하는 명분 때문에 용서가 된 것이면 진정한 용서라 할 수 있을까? 눈시울이 빨개진 친구와 나는 서로 말이 없이 지하 11층에 마련된 관객다방으로 향한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발걸음을 가지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수다를 하고자.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믿고 싶지가 않아.” “우리나라 굿할 때처럼, 그 북소리도 환청과 환영을 보게 하는 것일 테지?” “하지만 단지 소리하나로 다들 미쳐가는 건 이해하기가 힘들어.” “미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 나 같았으면 미쳤을 거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지.”
관객다방에서 주는 과자 한 봉지가 어느 새 바닥이 나 버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만에 남편 이야기, 아이들 학원과 성적 이야기에서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상처받았었는데…… 우린 그때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속한 세상을 뛰어넘어 전쟁을, 여성을, 어머니를 이야기 하고, 그것도 모자라 내일 볼 영화를 선택하고 있었다. 떡볶이 집에서 머리 맞대고 어디를 갈지 의논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내일은 어떤 영화가 나를 일상에서 탈출시켜 줄까?’
여성 영화감독과 아줌마 관객
다음날, 이미 영화관은 빈 좌석이 없다. 대부분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잔뜩 주눅이 들어 앞에서 세 번째 자리 구석을 차지하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시간’이 있다고 한다. 그 시간이 되자 여성 감독이라는 것이 궁금하여 제일 앞자리로 옮겨 앉았다. 감독인지 배우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미모의 감독을 대하는 순간. '예쁘고 영화도 잘 만들고, 부럽다.’ 모더레이터가 감독을 소개한다. 회화를 전공했고, 감독이기도, 모델이기도, 배우기기도 하다고 한다. ‘이러 거 질문해도 될까? 궁금하잖아! 안하면 손해야!’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나중에 질문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선을 연결하면 소리가 보이나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고, 감독은 장황하게 7~8분 동안 이야기를 한다. 통역 내용을 듣고 왜 젊은이들이 키득거렸는지를 알았다. 그야 말로 상징을 통한 설정이었다는 것이다. 선을 연결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과거의 사건들을 선의 한 지점으로 끌고 와 본다는 설정이라는 것이다. 내 얼굴은 화끈거렸고 계속 이어지는 젊은이들의 질문은 전문가 수준으로 고급스럽기만 하다.
‘내가 이렇게 단순했다니, 예전에는 그래 저 정도의 상징성, 불규칙한 화면구성을 다 이해한다고 독립영화니, 프랑스영화니,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두고 촌스럽고 세대차이 난다고 하던 말이 새삼 실감났다. 감독은 아줌마를 이해시키려고 많은 말을 하면서 계속 눈을 피하지 못하게 쳐다본다. 얘기해 주고 싶다. ‘저기요. 아줌마들이 다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영화 나들이가 처음이라서요.’ 감독은 얼마나 당황하였을까? 자신이 만든 영화의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질문하는 관객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줌마, 다시 영화로
도서관에 ‘찾아가는 영화제’ 라는 제목의 안내문이 나왔다. ‘어라! 영화제? 무슨 영화야? 도서관에서 틀고 있는 무료 감상영화는 한물 간 영화가 대부분인데…… 그저 그런 영화가 아니겠어?’ 그런데 제목도, 감독도, 상영시간도 다른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를 보고 이야기도 나눈다고 한다.
“영이 엄마. 도서관에서 영화제 한대. 옆집 철이네랑 같이 와. 그래, 거기서 만나.”
둘러보니 못 보던 사람들도 많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사람들도 섞여 있다. 아저씨도 있고, 어머니랑 운동 왔다가 같이 왔다는 사람도 있다.
“영화가 짧으면서도 깊이가 있네요.” “어머니랑 영화 보러 가고 싶어도 요새 상영하는 영화는 자막도 빠르고, 치고 박고 싸우는 것 투성이라서 힘들었는데 소재도 좋고 재미있네요.” “여성영화제라는 게 뭔가요?” “이런 영화라면 계속해서 보고 싶어요.”
나이를 초월한 대화가 이어진다. 세대공감이라고 해야 할까? 도서관에서 모인 사람들의 편을 가르라면 시어머니 대 며느리, 엄마 대 딸, 할머니 대 손녀와 손자. 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는 힘은 무엇일까? 사는 곳도, 사는 방식도, 삶의 태도도 다를 텐데 그날 여성영화를 보고 공감하고 즐거워하는 표정들이 한결같다. 봄날 담장에 개나리를 보고 탄성을 지르듯이 반가운 얼굴들이다. 영화가 주는 매력일까?
하지만 대형 상영관에서 영화를 볼 때에는 긴 줄에 기름에 전 팝콘 냄새, 억지로 보고 들어야 하는 광고와 알 수 없는 음악들이 섞여 피곤하기만 했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한 번에 쏟아지는 인파를 제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급하게 주차권을 지불하고 잽싸게 빠져 나와 밀리지 않는 교통시간대를 잡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영화를 볼 때 으레 하던 행동들을 다 밀어내 버린다. 아담한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공통된 화제를 떠올리며 웃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시간은 나의 것으로 주어졌다. 장바구니 들고 교통시간대를 피할 일도, 역겹게 올라오는 도시 냄새와 소음들과 싸울 일도 없다.
그러면서 나를 다시 생각한다. 어머니의 인생, 나의 인생, 딸의 인생, 여자로서의 인생을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고 또 세상이 넓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바득바득 콩나물 값 깎으며 사는 인생이나 멋들어진 와인 바에 앉아 와인을 음미하는 인생이나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여자라는 인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성영화는 그렇게, 한 마리 흰나비로, 수많은 꽃가루의 생명으로 내게 다가와서는 같지만 또 다른 다양함을 일깨워주었다. 다들 모두가 자본에 의해 외길 고속도로로만 간다고 걱정이다. 다양한 사회, 지식, 문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다양함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나는 누구에게든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추천한다. 영화제를 통해 얻은 다양함의 힘을 나는 지금 ‘어린이책 시민연대’에서 주변 아줌마들과 동화를 통해 그리고 영화를 통해 참삶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또 조만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연대를 하면 어떨지 고민 중이기도 하고 말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4월에 열린다. 봄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모두에게 다를 것이다. 낡은 레코드판이 돌아가는 영상과 그 극장 앞 모르는 이들의 환한 미소를 닮은 4월이 기다려지는 것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내 가슴에 다시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봄날, 누구하나 진달래처럼 진홍빛 가슴을 가지 않은 아줌마는 없을 것이다. 긴 스카프를 흐트르며 봄을 알리는 매화는 비처럼 내릴 것이고, 아줌마들의 수다는 관객다방의 과자봉지보다 더 부풀어 오를 것이다. 아줌마는 매표소에서 방황을 하겠지만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갈 것이며, 봄의 제단에 오른 여성영화를 맛나게 요리할 것이다. 4월은 그렇게 영화에 날개를 달고 아줌마 가슴에 내려 앉으리라.
- 김태희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후원회원,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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