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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보라]

아시아 단편경선 메리케이 최우수상 <고백> 유지영 감독 인터뷰

감정의 노즐을 발견하다!

 

제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 메리케이 최우수상을 받은 <고백>의 유지영 감독님과 서면으로 이루어진 인터뷰를 싣습니다. 


 

유일한 경쟁부문인 아시아 단편경선은 아시아 여성영화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참신한 부문으로 주목받아왔습니다. 2001년 신설된 아시아 단편경선은 정재은, 박찬옥, 장희선, 이경미 등 재능 있는 한국 여성감독을 배출한 바 있습니다.




Q. 폐막식 때 감독님의 수상소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28살 암울한 시기에 아시아 단편경선 본선진출 했다는 여성영화제에서 걸려온 전화가 희망을 줬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감독님이 힘들었던 28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A. 영화제 소식을 들었을 당시엔 스물여덟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여서 꼭 그때 어떤 상황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 구체적으로 잘 잡히지는 않는데 어떤 판단이 맞는건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떳떳할지 인생운전초보자로서 갈팡질팡 하는 그런 과정들이 힘든 것 같아요. 제 나이또래는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요. 내적, 외적으로 결핍된 부분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운데 좀 더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 애를 써왔던 것 같아요.

Q. 다소 전형적이고 딱딱할 수도 있는 질문을 먼저 드립니다. <고백>으로 아시아 단편경선 메리케이 최우수상과 전주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셨는데요, <고백>을 만드시게 된 계기와 연출의도를 듣고 싶습니다.

A. 졸업 작품 구상 중이었고 이런 저런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어요. 영화 오프닝에서 박씨가 담을 넘다가 영배를 만나는 장면이 이야기 구상의 시작이었는데 평소 진지한 상황인데 뭔가 웃긴 뉘앙스가 있는 광경을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불쑥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된 타인과 보내는 어색한 시간이 재밌다고 느꼈고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실체를 잘 모르는 타인의 생각을 불쑥 알게 되는 건 외상적인 면이 있어서 내가 접해보지 못한 상대방의 영역을 덮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자신의 감정적 변화에 주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Q.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독실한 기독교 신자 박씨’로 시작되는 <고백>의 시놉시스를 처음 받았을 때 홍보팀 스텝들은 영화를 못 봤기 때문에 박씨가 남자인 줄 알았습니다. 보도자료집 제작 때문에 프로그램팀 스텝들과 이야기를 하다 박씨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박씨’라고 지칭했을 때 남자라고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되는 습관(이런 습관은 편견을 낳기도 하지요)으로 빚어진 해프닝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의도적으로 ‘박씨’로 표현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A. 인물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서 특정 캐릭터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감을 두었으면 한다는 의도에서 그렇게 했어요. 영화 속에서 실제로 ‘박씨’ 라든가 이름이 호명되진 않잖아요. 연출적인 부분에 있어서 영화의 톤을 잡는데 저 스스로에게 필요했던 것 같아요.

Q. <고백>의 엔딩은 주인공 박씨가 뒷문에 방범창(방범시설)을 하는 걸로 끝납니다. 박씨의 심경변화를 표현한 장면인 것 같은데요, 박씨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요? 박씨가 본인이 여자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 부분인가요?

A.
작은 주제가 있고 큰 주제가 있는데 그걸 미리 말하면 앞으로 보실 분은 재미없을 것 같아요.ㅎㅎ ‘본인이 여자라고 자각한다’는 부분은 작은 주제에 좀 더 가까울 것 같은데요.
프린터기에 잉크를 오래 사용하면 여러 개의 노즐 중에 몇 군데 구멍이 막힐 때가 있어요. 한두 개 노즐이 막혀도 전체 그림을 인쇄하는데 큰 문제는 없고 무시하고 그냥 쓰기도 하는데 그래서 막힌 줄도 모르는 경우도 많고요. 사람의 감정도 평소에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잠재되어 있던 감정이나 욕망이 인식되는 순간이 있잖아요. 박씨의 마지막 시퀀스는 막혔던 인식의 노즐 하나가 뚫리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게 꼭 성정체성의 문제다, 라기 보다 ‘인식한다’에 더 초점을 맞췄어요.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이 새로운 인식으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순간에 영화를 끝내고 싶었어요. 

Q. <고백>은 졸업작품이자 두 번째 연출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편 연출작 <잘하고 싶은데>는 어떤 작품인지와 <고백>과 <잘하고 싶은데>를 통해 일관되게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A. <잘하고 싶은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후반작업이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는데요. 그 영화는 되게 소심하고 좀 순수한 여자가 자기 식대로 사랑을 시작하려는 가운데 작은 봉변을 당하는 이야기예요. 이번 영화와 특별히 연결고리가 있다면 보편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는 거구요.
누구나 컴플랙스가 있는데 제 경우엔 성격이 가장 큰 컴플랙스거든요. 그 컴플랙스 때문에 삶이 고단해져서 어떻게 하면 좀 더 괜찮은 인간이 될 수 있을지 계속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산다고 사는데 일은 막 꼬이고 손해를 보기도 하고 폐도 끼치고 그런 것들이 캐릭터와 상황을 통해 영화에 드러나는 것 같아요.

Q. <고백>에서 DVD방 알바생으로 출연하셨더라구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A.
제가 예전에 알바를 했던 카페 사장님이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저에게 “너 색기있게 생겼어.” 이런 말을 했는데 그땐 어리고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지 않아서 당황을 했었었거든요.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한테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툭 던지는 게 되게 폭력적인거라 가끔 생각이 나곤 했어요. 시나리오를 쓸 때쯤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그때의 상황을 피식 웃어넘길 수 있어서  “색기있게 생겼다.” 라는 희화화된 대사를 제가 반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미쳤던 것 같아요.

Q. 단편영화 제작 환경은 어떤 편인가요? 제작비도 만만치 않고 배우 섭외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백>의 주인공 박현영씨 섭외 과정은 어떠셨는지도 궁금합니다.

A. 단편영화에서 캐스팅 과정은 꼭 캐스팅 하고 싶은 배우가 있는데 그 분께서 시나리오에 흥미를 느끼셨다면 운이 좋은 거고 인연이 시작될 가능성도 있는 거고 그 후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전반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캐스팅 확정될 수 있게 노력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박현영 선배님과도 이런 과정을 통해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선배님께서 출연하신 단편영화들을 인상 깊게 봤었고 직접 만나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잘 통하는 부분이 있어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 같아요.
단편영화 제작 환경은 보통 감독 사비로 하고 지원을 받기도 하고요. 그나마 학교 안에 있을 때 둘 다 접근이 쉬운 것 같아요. 혼자 작업할 때는 더 어려운 게 많죠. 예를들어 저자본에 좋은 장비를 못 쓰고 전문적인 스텝이 아니더라도 자기만의 방식과 색깔로 꾸준히 작업을 해갈 수 있는데 인정받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면 다음 작업을 할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니까요. 그래서 완성도를 높여서 영화제에 내려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Q. 단편영화는 장편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일 수도 있고 단편영화만이 가지는 독특한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독립적인 장르이기도 합니다.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단편영화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보통은 두 시간짜리 영화를 더 좋아하고 자주 보지만 작업 구상할 때나 기분을 새롭게 하고 싶을 때 단편영화를 찾아 봐요. 장르, 개성, 이야기, 주제가 다양한 몇 편의 단편영화를 몰아서 보고나면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가 존재할 수 있구나 새삼 느끼고 자극이 되거든요. 그렇게 보면 단편영화는 고유한 개성이 강한만큼 다른 단편영화들과 함께 보여질 때 더욱 존재감이 커지는 것 같아요.

Q. 진부하다면 진부한 질문이겠지만 아니하고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을 드려야겠네요. 여성영화제에 출품을 하게 된 이유(나 계기)와 평소 여성영화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A.
여자라서 기본적으로 호감이 가요. 같은 여자들끼리 있으면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요. 주인공이 여자였기 때문에 출품은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Q. 위 질문과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젊은 감독님들에게 꼭 묻고 싶었던 궁금증이기도 합니다. 여성이 감독으로 영화제작 현장에서 활약하기는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여성’감독과 여성‘감독’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에 중점을 둘 수도 있고 두 가지 모두에 중점을 둘 수도, ‘여성’감독도 여성‘감독’도 아닌 ‘독립영화감독’에 방점을 찍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여성감독의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라 매우 다양할 수 있다는 말인데요, 감독님은 어떠신지, 또래 여성감독님들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A. 감독 앞에 '여성' 이라는 단어를 붙였을 때 또 하나의 영화 장르를 만드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저는 여성이 아닌 '감독'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여성적인 영화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고민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정체성이 다양하다는 말은 한 곳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텐데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 함께 하고 있다면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요.

Q. 끝으로 최근 근황과 졸업하시고 향후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장편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어요. 웃기면서도 씁쓸한 영화가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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