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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SIWFF]

잡년행진의 기나긴 AS(애프터서비스), 앞으로의 행보


지난 7월 16일 서울 광화문 원표공원에서는 잡년행진이라 번역된 "슬럿워크 Slutwalk"가 있었습니다(‘슬럿워크’(Slutwalk·잡년행진)는 지난 1월 24일 캐나다 토론토의 대학 캠퍼스 안전교육에서 경찰관이 언급한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슬럿처럼 입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한마디가 촉발한 행진이다. 한국에서는 온라인 공간인 트위터를 통해 개인들이 모여 준비하고 지난 7월 16일 서울 광화문 원표공원에서 행진을 가졌다. 준비 기간 내내 온라인상에서는 잡년행진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지지, 오해가 등장했다). 그 행진에 참여하고, 자처해서 공연을 가졌던 나는 어쩌다 보니 슬럿워크에 밀려드는 원고청탁 몇 건을 수락하면서 슬럿워크 전문 기고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참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지면을 빌어 잡년행진을 준비하고 지지해준 많은 잡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잡년행진-슬럿워크, 왜 싫어?


잡년행진-슬럿워크는 한국에서 처음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지지와 응원도 많았지만, 혐오와 모욕, 비난도 많았습니다. 준비했던 많은 이들을 비롯해 슬럿워크를 지지했던 이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이 의아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트위터나, 뉴스 댓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혐오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예를 들어, “너희 같은 년들은 아무리 벗어도 안 꼴린다!”, “너 같이 못생긴 꼴페미년은 강간당할 걱정 안 해도 되니까 걱정 말고 밤거리 돌아다녀라!” 등등의 슬럿워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관심을 갖지도 않은 채, 이 행진을 준비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모욕하고 상처주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나는 이런 반응들이 궁금했습니다. 잡년이라는 부정적인 명칭 때문에 우려를 표하는 세련된 혐오도 있었지만, 원색적으로 잡년행진 논의 자체에 몹시 화를 내는 “남성의 성욕은 본능이다.”, “너희의 야한 옷 자유를 주장할거면 강간에 대한 책임져야하지 않느냐?”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의 욕설과 분노가 있었습니다. 왜 저들은 저렇게 화를 낼까? 무엇이 저들을 화나게 한 것일까? 저들은 과연 내 주위에서 발견할 수 없는 자들일까?

‘문화 연구’를 한다는, 대중과 서로 이해가능한 언어로 대중적 지식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페미니스트로서 과연 나는 어떻게 대화의 물꼬를 터야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런 고민 끝에 쓰인 글을 한 매체에 기고했습니다(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슬럿워크가 잡년과 여러분께」클릭하면 해당사이트로 연결됩니다). 그 글이 온라인에 공개되고, 수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장장 57페이지에 달하는 열정적인 댓글들, 토론 글들이 달린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토록 자극했을까? 궁금해 댓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실망스럽게도 대다수의 댓글은 본문을 읽지 않은 채 작성되거나, 읽었다고 해도 오독이 드러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구구절절하게 남성적 문화에 익숙한 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공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글을 썼으나 글이 너무 긴 탓이었는지 제대로 읽지도 않고, ‘야하게 옷 입을 자유도 중요하지만 책임을 져라.’라는 요지의 글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야한 옷 입은 여자에게 남자들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렇게 옷 입지 말라는 것에 왜 난리냐’, 혹은 강간을 절도 사건에 비교해 ‘지갑, 귀중품 간수 잘못한 사람에 대해 얘기해도 과민반응하지 않는데 왜 그러냐’는 둥, 정말 왜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걸까 상상하기 어려운 글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는 정말 소통 불가능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 페미니스트 가수로 십여 년, 한국의 페미니즘역사 30-40년이 무용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선배 “꼴페미”들의 노고와 투쟁은 헛된 것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잡년행진에 화내고, 잡년행진을 미워하는 목소리가 드높아도 잡년들은 앞으로의 행보를 유쾌하게, 즐겁게 상상하고 그려내고 있습니다. 몇 번의 후속 모임을 통해 잡년행진은 지속적인 활동을 만들어내는《잡년행동》으로 진화했고, 장난처럼 가부장제, 남성중심사회를 엿 먹이는 메탈밴드《잡년토크》를 만들어보자고 뜻을 모으고, 행진으로 모인 후원금을 여성가족부앞에서 90일 가까이 복직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대자동차 하청기업의 성희롱 부당해고 피해자에게 전달하고, 곧 다가올 9월 18일에는 그 농성장 앞에서《잡년난장》을 벌이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잡년이자,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선배 페미니스트들의 우려를 날려버릴 만큼 에너지 충만하고, 날카롭고, 총명한 여성과 남성 청년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움직임을 만들고, 소리 내고, 모이고, 서로 힘주고,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에 감사하고 감동하는 동시에 그들이 놓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페미니즘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페미니스트 게토가 아닌 이곳저곳, 연대가 필요한 곳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손을 잡고 응원하고, 함께 싸우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1977년 한국에 첫 여성학 수업을 개설한 이후 30년, 40년을 꾸준히 싸우고, 설득하고, 타협해온 선배 페미니스트들, 활동가들의 흔적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페미니즘이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들, 함께 합시다


악성댓글로 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보면 '한국의 페미니즘을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었던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이 아름다운 “잡청년”들을 보면 그런 회의가 무색해집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잡년들과의 만남이 감동적이고 뜨겁고, 행복하고, 희망을 준다고 여기게 되나 봅니다.

《잡년행동》의 청년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발자취와 잡년행진을 둘러싼 한국사회 안의 반응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선보일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이 청년들이 참 소중합니다. 이들이 절망하고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들이 응원하고 있다는 것, 외롭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걸음걸음을 만들어 내기를 바랍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 슬럿워크와 관련된 기사들


[논쟁] ‘슬럿워크’ 운동에 대하여 [한겨레 2011.07.19] (클릭하면 해당사이트로 연결됩니다)
두려움 없는 잡년들의 행진 [한겨레21 2011.07.25 제870호] (클릭하면 해당사이트로 연결됩니다)


- 글 :
지현 페미니스트 가수 문화연구자 / 사진 : 모리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