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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보라]

여성주의적 관심사와 소통을 말하다_여성영화 가이드북

 


최근 한국영화를 보고 있으면 누구보다도 여배우들이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자들이 주인공인 <써니>가 역대 박스오피스 15위 안에 안착한 것이 2011년의 의외의 성과(?)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영화들은 온통 남자들 이야기뿐이다. 최근 10년간의 한국 영화를 보면 남자들은 떼거지로 몰려나와 거의 군무를 출 정도이지만, 그 틈에서 한 명 이상의 제대로 된 여성캐릭터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괴물>,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친구> 등의 역대 박스오피스 상위권의 영화들에서 <최종병기 활>, <조선명탐정>, <완득이>, <고지전> 등 2012년 히트작들까지 촘촘히 살펴봐도 대체로 남성 캐릭터의 천국이다. (영화를 보면 남성들 틈에서 꽃처럼 빛나는 단 한 명의 여성 캐릭터들이 떠오를 텐데, 나에게는 그 역시 어쩐지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시대정신의 반영이고, 또 그 시대정신의 확대 재생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러므로 남성만이 언제나 내러티브의 동기부여자이자 주인공인 이 사회의 남성중심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여배우들의 일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 것 같다. 오버일 수도 있겠지만 "일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여배우들이여 여성주의자가 되자"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고민을 조금 더 확장해보면, 그만큼 한국 상업영화 지형에서 여성영화를 보기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된다. 여성주의적 관심사를 다룬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관객을 만족시킬만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조차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여성영화제가 왜 필요하냐"는 그 흔한 질문에 대한 가장 생생한 답변은 이렇게 한국 상업영화의 현실 속에서 펄떡펄떡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1년에 한 번, 8일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서울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개최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충분하지 않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아카이브 보라'가 그 활동을 더욱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확장하려는 핵심적인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해서 말 그대로 '다양한 영화'를 관객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나름의 필연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카이브 보라'의 작품을 이용해 여성주의를 교육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여성영화 가이드북'이 기획된 것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조금 더 쉽게 편안하게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이면에는 "여성영화제는 뭔가 어렵다"는 기존의 평가들에 대한 각성 역시 존재한다.

'여성영화 가이드북'은 '아카이브 보라'의 작품을 여성주의 교육에 활용하기 쉽도록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이 교재의 방점은 영화 자체라기보다는 여성주의적 관심사와 그것의 소통에 놓여있다. 교재는 여성운동, 몸, 섹슈얼리티, 세계화 시대의 노동과 이주, 성폭력, 가족, 환경, 그리고 평등과 연대 등 여덟 개의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여성운동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이자,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중점적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여성주의 의제이기도 하다. 물론 기존의 여성학 담론 안에서 형성되어 있는 분류를 참고하고 있기 때문에 혹시 대학이나 단체에서 '여성주의 개론' 정도의 수업을 기획할 때 커리큘럼 전체를 이 교재를 바탕으로 구성해도 크게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했다.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면, 각 주제별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 주제가 놓여있는 맥락과 의의를 설명했고 해당 주제에 접근하기에 적당한 '아카이브 보라' 작품을 선정, 그에 대한 해설을 첨부했다. 이어서 영화를 보고나서 토론할 수 있는 질문들을 예시로 제시했고, 더불어서 '아카이브 보라' 작품 이외에도 이 주제에 관련해 볼만한 영화가 있다면 추천했다. 교재의 방점은 영화보다는 여성주의에 찍혀있지만, 물론 개별 작품을 어떻게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읽을 수 있을지에 대한 팁 역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성영화 가이드북'은 정말로 활용될 만한, 유용하고 효과적인 '영화를 활용한 여성주의 교육'을 위한 교재의 출발점이다. 필자들과 여성영화제 스텝들이 그 필요에 대한 절감과 진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교재가 완성된 것은 물론 아니다. 교재의 완성은 교재를 활용하는 분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직접 현장에서 사용해 본 분들의 피드백이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만간 '아카이브 보라'에서 아카이브 및 교재 활용과 관련해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을 오픈한다고 한다. 그곳에 교재에 대한 다양한 피드백을 남겨주시면 좋겠다. 무엇보다 더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이루어질 토론에 대한 가이드라인들이다. 지금 교재에서는 그것을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라는 소제목 아래 학생들에게 던져볼 만한 질문들로 정리해 놓았는데, 현장에서 훨씬 더 흥미로운 질문과 토론주제가 등장할 것이다. 그런 피드백을 주시면 충실히 반영해서, 다음 기회가 있을 때 교재의 업그레이드에 활용하겠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조금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영화제의 자원을 활용하여 첫 걸음을 뗐을 뿐이다. 완성은 이를 활용하는 우리들의 몫이길 바란다.


- 글 : 손희정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강사, <여성영화 가이드북> 책임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