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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소녀에서 철학자, 페미니스트에서 섹스심볼까지_제37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소녀에서 철학자, 페미니스트에서 섹스심볼까지  _제37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65회 칸국제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5월 20일,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 시사회장 앞 레드카펫 위에서 얼굴에 가짜 턱수염을 붙인 여성들의 항의 시위가 있었다. 게릴라 걸즈의 구겐하임 뮤지엄 시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작 22편 중 여성감독의 영화는 전무했고,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년 전인 2010년 경쟁부문에도 여성 감독의 작품은 없었고, 지난해 경쟁부문에 4편의 여성 감독 영화가 진출한 것이 지금까지 칸영화제 최고 기록이다. 칸영화제가 지속되어온 64년 동안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은 제인 캠피온(<피아노>)이 유일하다. 올해 칸영화제는 영화제의 성차별성에 대한 비판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전 세계 여성영화인들의 인터넷 서명 운동 속에서 영화제의 성별 편향성과 정치성에 대해 고민해야할 심각한 필요성을 불러일으키며 막을 내렸다.

 

 

 

 

** 사진 ▲프랑스 여성단체 ‘라바브’ 회원들이 항의 시위하고 있다. ©출처: www.labarbelabarbe.org **

 

 

 

토론토국제영화제의 경우는 어떠할까? 지난 9월에 열린 제37회 토론토국제영화제의 갈라 섹션 상영작 20편 가운데 6작품이 여성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은 환영할만한 시작이었다. 그러나 거장 감독들의 신작을 상영하는 마스터 섹션에는 여성감독이 단 한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뉴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여성감독이자 60년대 이후 현재까지 활동해온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과 대표적 페미니스트 감독 샐리 포터(Sally Potter)는 스페셜 스크리닝 섹션에서 상영된 반면, 90년대 이후 작업해온 한국의 남성 감독 김기덕과 홍상수의 작품은 마스터 섹션에서 상영되었던 점은 결코 유쾌할 수 없는 대비를 이룬다.부산국제영화제 역시 서구의 유수 영화제들과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이제 너무 진부해져버린 느낌이다. 이런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이런 비판도 새로울 게 없다. 그러나 이 진부한 주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세계 주요 영화제들이 선호하는 감독과 주제의 성별 편향성에 대한 개입의 필요성이 절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다양한 여성영화제 관계자들과 여성영화 관련 매체에 몸담고 있는 여성들의 공통된 목소리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 세계 여성영화제들의 역할과 목소리라는 책임감 역시 공유하게 되는 지점이었다.

 

그런 액션의 일환으로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프랑스, 북미, 캐나다 등에서 온 여성영화제 관계자들과 만나 세계여성영화제 네트워크를 위한 준비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시작은 올해 4월 독일 도르트문트여성영화제에서 열린 컨퍼런스가 계기가 되었고, 현재 세계 여성영화제에 대한 정보와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여성영화제가 서로 프로그램을 교류하고 공동의 액션을 만들어가기 위한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성과를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영화제의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 사진 ▲ 여성영화제 네트워크 홈페이지(internationalwomensfilmfestivalnetwork.com) 현재 가오픈 상태이다. **

 

 

 

이제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토론토에서 나를 흥분시켰던, 사랑해 마지않는 감독들과 작품들을 소개하려한다. 앞서 언급했던 샐리 포터의 <진저와 로사 Ginger and Rosa>, 마가레테 폰 트로타(Margarethe Von Trotta) 감독의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여성 거장 감독의 건재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끔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비전> 등에서 강인한 실존 여성 인물들에 대해 다루어온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강력한 여성 인물로 파워풀하게 돌아왔다. 유대계 독일인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를 그린 이번 작품은 그녀의 일대기를 서사적으로 풀어내는데 전혀 관심이 없다. 감독은 그녀 삶의 다른 부분들은 과감히 배제한 채, 오로지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재판을 통해 나치의 인종주의적 대학살의 성격을 “악의 평범성”으로 개념화했던 순간에만 집중한다. 그녀의 사상적 궤적 속에서 가장 주요한 순간에만 집중한 감독의 과감한 이 선택은 사회적 반감과 살해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한 철학자의 예리한 통찰력과 강인함을 보여주는 마지막 강연 장면의 롱테이크에서 빛을 발한다.

 

 

 

 

** 사진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열린 마가레테 본 트로타 감독의 특별강연. 중앙에 앉은 분이 마가레테 본 트로타 감독 ©출처: www.goethe.de/arthousefilm **

 

 

 

 

** 영화 <한나 아렌트> 스틸 **

 

 

 

 

** 영화 <한나 아렌트> 트레일러 **

 

 

 

 

할리우드 여배우 엘르 패닝과 제인 캠피온의 딸 앨리스 잉글러트가 여주인공으로 연기한 샐리 포터의 신작 <진저와 로사>는 68년 해방 운동이 폭발적으로 튀어 오르기 전인 60년대 초를 배경으로 정치적 좌파 교수와 화가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두 소녀들의 정치적 실험과 성적 해방, 여성들 간의 우정을 다루고 있다. 오랜만에 여성주의적 이슈로 돌아온 샐리 포터의 신작은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영화 <진저와 로사> 스틸 **

 

 

 

 

** 영화 <진저와 로사> 트레일러 **

 

 

 

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는 흥미로운 구성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여성 다큐멘터리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대표적으로 <프리 안젤라 Free Angela & All Political Prisoners>, <러브, 마를린 Love, Marilyn>,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Stories We Tell>를 들 수 있다. <프리 안젤라>는 흑인 해방 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 사회주의 운동의 선두에 있었던 안젤라 데이비스를 조명한다. 그녀는 여러 사회적 활동으로 인해 FBI 요주의 인물이 되고, 당시 미국 정부의 정치 공작으로 1급 살인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른다. 영화는 이러한 모든 정치적 공작들이 사회주의의 확산과 흑인, 여성 해방에 대한 폭발적 요구가 두려웠던 미국 정부에게 있어서 '흑인''여성''사회주의자'로서 발언하는 그녀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는지를 반증하는 징후였음을 밝혀낸다.

 

 

** 영화 <프리 안젤라> 트레일러 ** 

 

 

전 세계적 섹스심볼, 마를린 먼로는 그녀의 섹시한 이미지에 대해서 만큼이나 세 번의 결혼실패와 약물중독, 의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운의 사생활을 통해 이야기되곤 했다. 다큐멘터리 <러브, 마를린>은 마를린 먼로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전환하여, 거대한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희생양이라기보다는 영화 산업의 생리를 꿰뚫어 보고 가능한 이미지 전략을 협상함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온 인물로서 마를린 먼로를 재구성해낸다. 마지막으로 캐나다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여배우 사라 폴리(Sarah Polley)는 <어웨이 프롬 허>와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로 뛰어난 연출 역량을 선보인 이후 세 번째 작품으로 토론토영화제를 찾았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은 놀랍게도 자신의 가족사를 추적하는 일종의 모큐멘티리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이다.

 

 

** 영화 <러브, 마를린> 스틸, 영화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스틸, 감독 사라 폴리 사진 **

 

 

 

이외에도 수잔 비에르(Susanne Bier)는 전작에 비해 다소 무게감을 뺀 로맨틱 코미디 <러브 이즈 올 유 니드 Love is All You Need>로 관객과 만났고, 인도 여성감독 디파 메타(Deepa Mehta)는 살만 루시디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자정의 아이들 Midnight's Children>을 통해 인도의 조각난 역사를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형상화해냈다. 아시아 작품으로는 두 명의 일본 여성감독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니시카와 미와(Nishikawa Miwa) 감독의 <꿈 파는 두 사람 Dreams for Sale>과 타나다 유키(Tanada Yuki) 감독의 <하늘을 본 겁쟁이 The Cowards Who Looked to the Sky>가 그 주인공. 두 편의 영화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 자본주의 도시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좌절과 외로움을 블랙코미디로 엮어냈다. 토론토영화제에서 전체 219편의 영화 가운데 여성감독의 작품이 34편으로 15.5% 혹은 남녀 공동감독까지 포함한다면 16.8%에 해당하는 여성감독 작품이 상영된 셈이다. 높은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영된 대부분의 여성 영화들이 일정정도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강력한 여성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많았다는 점에서 행복한 출장길이었다.

 

 

 

 

- 홍소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