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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연재를 시작하며] 비욘세, 'F word' 그리고 영화산업




'F word'의 낙인과 제 3세대 페미니즘의 가능성



    

비욘세는 2014년 MTV 비디오 뮤직 수상식에서 자신의 노래 “플로리스(Flawless)”를 부르며 배경 전면에 “FEMINIST”라는 단어를 전광판에 띄웠다. 그리고 뮤직 비디오에서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Chimamanda Ngozi Adichie)의 연설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를 샘플링해서 넣었다. 비욘세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곧 바로 유명 페미니스트 블로그와 소셜미디어네트워크, <가디언>과 <슬랜트> 같은 진보적 매체들에서 열광적인 반응과 논쟁을 불러오며 ‘비욘세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까지 등장시켰다. 비욘세에 열광했던 소녀들뿐만 아니라 동료 가수와 배우들 또한 그녀를 따라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커밍아웃’하기 시작했다. 비욘세의 퍼포먼스는 단기간에 페미니즘에 찍혀있던 부정적 낙인을 약화시키고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쿨한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비욘세의 페미니스트 선언과 퍼포먼스를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가수 애니 레녹스를 비롯한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비욘세가 노골적으로 남성의 시선을 위해 자신을 성적 대상화하는 퍼포먼스와 이미지를 만들어내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지칭하는 것은 결코 어린 소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했으며, 저명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저술가인 벨 훅스 또한 자본과 분리 불가능한 비욘세의 위치를 생각할 때 페미니즘을 브랜드화하고 상품화하는 그녀는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테러리스트라고 비판했다. 또한 몇몇 대중문화평론가들은 비욘세가 자신의 콘서트 투어의 명칭을 남편의 성을 따서 ’Mrs. Carter Tour’라고 이름 붙이거나 결혼생활과 남편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이 페미니스트라는 선언과 모순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연히 반론도 있었다. 이 모든 비판은 타당하지만 비욘세의 실천을 음반 산업의 한 중심에 있는 가수라는 직업과 흑인 페미니즘이라는 두 가지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비욘세라는 하나의 인간을 단일하고 통일된 이미지로만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비욘세를 비판한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그중 마돈나는 제 2세대 페미니즘에서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진지하게 거론되고 연구되어왔는데, 왜 비욘세의 퍼포먼스는 왜 이렇게 수많은 비판을 불러오는가라는 질문은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페미니스트 아이콘 수리공 로지와 로지를 모방한 비욘세 (출처: 비욘세 인스타그램)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작 왜 비욘세가 새삼스럽게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는지에 대해서는 잊히곤 했다. 비욘세가 지속적으로 주장한 것은 바로 ‘평등 신화’와 ‘유리 천장’이었다. 비욘세는 페미니즘이 역풍을 맞고 평등과 관련된 정책들이 제도화되면서 미국에서 마치 성평등이 모두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했지만 그것은 신화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현실의 여성들은 여전히 엄청난 성별상의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고 유리 천장은 여전히 공고하다는 것이다. 비욘세에게 페미니즘은 곧 성평등(gender equality)을 뜻했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전 세대 페미니스트에게는 너무 자명해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자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고전적 논의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이 세대에게 새롭게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다. 걸 파워(girl power) 문화를 누리고 비교적 불평등한 제약이 많이 없는 학교에서 생활하며 성별에 근거한 불평등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젊은 여성들이 실제 사회에 나와 맞은 현실은 크게 달랐다. 이 같은 자각과 흐름은 비욘세에 대한 호불호나 논쟁과는 별개로 어쩌면 제 3세대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대중적 운동의 시작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함께 하고 있는 ‘슬럿 워크’, ‘성폭행 반대 운동’, 러시아의 ‘푸시 라이엇’의 페미니즘 운동은 페미니즘이 새로운 세대와 함께 대중들과 다시 만나는 접점을 마련하고 있다는 지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사회에서도 90년대 중반 페미니즘 담론이 휩쓸고 지나간 후 수많은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페미니즘의 만남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현실은 거의 바뀌지도 않았는데 역풍과 낙인만이 난무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비욘세의 단순한 메시지는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다. 지금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깨지지 않는 유리 천장에 수없이 좌절을 경험하고, 자신의 경력과 노동, 신체, 생애주기 등이 모두 출산율로 수렴되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들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산업에서의 성평등은?


제 15회 서울국제여성여화제 국제학술대회(2013)    

 2세대 페미니즘과 함께 발전한 씨네페미니즘(cine-feminism)은 영화 재현 내에 형식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가부장적 시선에 대해서 비판을 했다. 이러한 비판은 매우 중요하고 여전히 유효한 것이나 한편으로는 형식이나 텍스트 그 자체에 치우치면서 또 다른 중요한 축에 대해서는 간과해온 경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산업에서의 유리 천장 문제이다. 영화산업에서 현재 여성감독의 수는 여전히 미미하다. 상대적으로 자본의 힘이 덜 지배적인 다큐멘터리와 독립 영화에서는 여성 감독의 수가 가시적으로 보일만큼 증가하고 있지만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하는 상업영화에서 여성감독의 수는 한줌에 불과하다(다큐멘터리나 독립 영화의 장에서 여성감독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상업영화 감독의 지체는 일상에서의 성별에 따른 임금격차와 여성에게 부과되는 무보수 노동처럼 자칫 이상한 성별분업화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상업영화 내에서의 여성감독의 비율은 분리해서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그리고 소수의 여성감독들의 흥행 성적이 과도한 대표성을 갖게 된다. 그 결과 데뷔작 이후 두 번째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여성 감독의 수는 더욱 줄어든다. 


현재 대학교를 비롯한 영화교육기관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영화 지망생 중 여성의 수는 거의 과반수를 차지한다. 영화제에서 단편 영화로 상을 받는 감독들 가운데 여성의 수도 상당하다. 그런데 왜 여전히 상업 영화에서 여성감독의 수는 늘어나지 않는 것일까? 심지어 영화관객 중 여성관객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언니의 돈을 투자받아 ‘자매프로덕션’을 세우고 아이를 등에 업고 현장을 지휘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첫 여성감독, 박남옥 감독(<미망인>, 1955년 제작)의 상황에서 얼마만큼 나간 것일까? 왜 여성감독의 비율은 늘어나지 않는 것일까? 일반적인 경제활동에서의 유리 천장과 영화산업의 유리 천장은 어떤 유사성과 차이를 갖는가? 여성 감독의 영화는 페미니스트적인가?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는 왜 상대적으로 흥행력이 떨어진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사실인가? 다양한 여성 캐릭터 부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현재 한국영화계는 질적 인터뷰는커녕 여성감독의 비율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유리 천장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것을 깨기 위해서는 일차적인 조사와 연구가 시급하다. 그리고 영화산업에서의 성평등 문제를 제기하고 주장해야 한다. 2013년 제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국제학술대회에서는 문제제기의 시작으로 이와 관련된 해외 사례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유사한 고민을 하고 있는 해외 연구자와 정책자들의 발표를 온라인상을 통해 재공유함으로써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를 촉구하고자 한다.



조혜영 / 프로그래머




* 연재순서

1부: 영화 산업과 여성 영화 정책

① 할리우드와 미국 독립영화 산업에서 여성 영화인의 현재 / 멜리사 실버스테인(아테네영화제 집행위원장, ‘우먼 앤 할리우드’ 창립자 및 편집장)

② 스웨덴의 “성인지적 영화 정책” 사례 / 토베 토르비욘슨(스웨덴영화진흥기구 영화/사회원장)


2부: 여성영화제의 문화정치학과 국제 네트워크

③ 프로그래밍의 기술: 여성영화제의 실험, 과거와 현재 / 노르마 게바라(프랑스 끄레떼이유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④ F워드: 여성영화의 미래적 이슈에 대응하기 / 베티 쉬엘(독일 도르트문트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여성영화제의 문화정치를 재조정하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사례 / 권은선(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 중부대학교 교수)

 이행기의 네트워크, 아시아 여성영화제 네트워크의 전망 / 아낫 쉬퍼링 코헨(이스라엘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