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규모 영화가 사라졌다” 한 목소리
여성영화인 연대 및 제도화 필요성 지적도
여성영화인모임 15주년 특별좌담회
지난 12월 4일 목요일, 안국동 씨네코드 선재에서는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대표 채윤희)이 주최하고 영화진흥위원회가 후원한 ‘2014 여성영화인축제’가 열렸습니다. 매년 이맘때쯤 이목을 집중시키고는 했던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시상식에 앞서, 올해에는 특별히 여성영화인모임 설립 15주년을 맞이해 “영화 생태계의 변화와 여성영화인의 위상변화 - 여성영화인이여 연대하라”라는 주제로 특별좌담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의 진행으로 열린 이날 좌담회는 각 분야별 여성영화인이 패널로 참여해 여성영화인모임이 창설된 이후 지난 15년 간 있었던 영화생태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각 분야의 여성영화인이 느끼는 변화의 양상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날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은 김미희(드림캡쳐 대표) 프로듀서, 문소리 배우, 임순례 감독, 주진숙 교수였습니다. 심재명 대표는 이들에게 골고루 각자의 분야에 대해 질문하였는데요, 이미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베테랑 영화인들인 만큼 가장 유효하면서도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아 좌담회의 격을 높였습니다. 이날 오갔던 좌담회 내용을 문답식으로나마 공유하고자 합니다.
심재명: 임순례 감독님은 현재까지 여덟 편의 장편영화(옴니버스 영화 <미안해, 고마워> 포함)를 연출하셔서 여성감독 중 최다작을 만드신 영화감독이십니다. 1996년 <세 친구> 이후로 지금까지 20여 년, 그리고 여성영화인모임에 참여하신 지난 15년이라고 하는 시간에 대한 소회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임순례: <미안해, 고마워>를 제외하면 일곱 편이 장편영화인데, 일곱 편으로 최다 영화라는 타이틀을 받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초라한 것이죠. 편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 이후를 잇는 후배 여자 감독님들이 훨씬 더 안정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변영주 감독님이나 방은진 감독님 같은 저보다 훨씬 능력 있는 여자 후배 영화인들이 영화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게 저의 소감이고요. 제가 93년도에 스크립터를 할 때 현장에서 여성 스태프라고 하면 거의 스크립터나 분장하시는 분, 의상하시는 분 이 정도였어요. 지금 보면 기술 파트도 그렇고 후반 작업 파트도 그렇고 어느 파트를 가든지 여성 스태프가 안 들어간 파트를 보기가 힘드니까 20년 사이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요. 그러나 한국에서 여성이 진출해 있는 다른 분야만큼 영화계가 나아간 것은 아니라고 봐요.
심재명: 문소리 배우님은 오늘 패널로 나와 주신 분들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에 활동을 시작하셨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계시죠. 1999년 <박하사탕>으로 장편영화 데뷔를 하셨고, 2002년 <오아시스>를 비롯해 지금까지 스물여덟 편의 작품 활동을 하셨고 그 중 장편은 스무 편입니다. 문소리 배우님께는 지난 15년의 소회가 어떠셨는지.
문소리: 여성영화인모임이 시작된 것과 제 데뷔연도가 같네요. 저는 1999년 부산영화제로 데뷔했고, 영화가 2000년 1월1일 개봉했었거든요. 여성영화인모임 역시 2000년도에 시작이 됐다고 하는데, 그 뒤에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주시는 상도 두 번이나 받았고 (심재명: “유일하게 두 번 받으신 여배우입니다”) 인연이 깊다고 생각하는데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1990년대, 그리고 그로 인해 다양한 한국영화가 시도되었던 그 시기에 제가 운 좋게 데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고 기다리는 직업이지만 결국 저 자신의 선택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제 필모그래피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볼 때 오히려 거리감을 두고 배우 문소리를 생각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과연 문소리는 어떤 배우인가. 이런 면에서 볼 때 앞으로도 부끄럽지 않고 뭔가 커다란 것을 한국영화에 돌려줄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여배우는 현장에서 ‘특별하게’ 여겨지는 현상이 꽤 있죠. 저는 그러지 않았던 적이 많기는 한데, 최근 들어 한국영화 규모가 예전과는 비할 데 없이 많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중심의 세계관, 역사관을 다룬 영화들이 더 많아지고 해서, 데뷔할 때와 비교해서 그런 부분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고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다루는 영화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제가 데뷔할 때만 해도 20억 정도의 작은 영화들이 많았고, 많은 감독들이 시도를 많이 했었는데, 최근은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기도 하고요. 이런 상황에서 저도 여성영화인의 연대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돼요. 여성 이순신 영화를 찍자는 것이 아니잖아요(웃음). 좀 더 다양한, 여성의 관점이 나타나는 그런 영화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 15년째의 소회인 것 같습니다.
심재명: 영화 분야에서 예전에는 여성 숫자 자체가 매우 적었죠. 프로듀서 분야도 마찬가지였는데 1999년 <주유소 습격사건>으로 시작하셨고 그 뒤에 <혈의 누>, <선생 김봉두> 같은 흥행작을 만드셨는데, 2000년대 중반에 상장 붐이 일었잖아요. 그러면서 싸이더스 F&H 의 공동대표 역임을 하셨고 지금은 '드림캡쳐'라는 제작사를 차리셔서 얼마 전에 <숨바꼭질>이라는 영화를 성공시키셨던 제작자분입니다. 제작하신 작품수를 다 헤아리기도 힘드신 김미희 대표님의 15년의 소회를 들어보겠습니다.
김미희: 심 대표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제가 프로듀서로 데뷔를 했을 때 메인 롤을 맡았던 여성영화인이라고 하면, 열 명 안팎의 여성이 프로듀서나 마케팅 담당 정도로 일하는 상황이었는데요. 지금은 양적으로나 퀄리티로나 여성영화인이 정말 많아졌죠. 당시에 여성으로서 겪었던 많은 일이 있었죠. 가장 기억나는 것은 <주유소 습격사건>을 공개했을 때 기자 분들이 일제히 “범죄영화”라고 표현했다는 점이에요. 저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영화가 범죄영화가 아님을 말하고 싶은데, 이런 것처럼 과거의 많은 잘못된 시각들, 또 여성을 향한 시각들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된 것이 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심재명: 주진숙 교수님은 한국영화비평계에서 많은 중요한 역할들을 역임해 오셨고요. 여성영화인모임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죠. 중앙대 영화학과에서 영화이론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한 20년 전에 영화과에 다녔던 여학생의 수는 아주 적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지금은 절반 아니면 절반 이상이 여학생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교수님이 학교에서 지난 15년 학생들을 가르치셨을 때 느꼈던 소회, 그리고 여성영화인모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주진숙: 제가 학교에서 제작이 아니라 이론을 주로 가르치다보니까 학부 학생들과는 친밀도가 낮아요. 이번에 이 좌담회를 위해서 엊그제 갑자기 여학생들하고 모임을 급하게 가졌었습니다(웃음). 15년 전, 10년 전만해도 영화학과 30명 정원에 여학생들 숫자가 적었을 때는 세 명, 어떤 때는 다섯 명 이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남학생이 열 명 안팎이면 여학생이 스무 명 안팎으로 비율이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장에는 여학생들이 많이 사라졌죠. 총명하고 똑똑했던 여학생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제가 만난 여학생들하고 이야기를 해보니 현장에서 이뤄지는 남학생들과의 차별, 혹은 여학생은 아예 불러주지 않는다는 현실 이런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여학생들은 똑똑해서 다 다른 길을 아예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드라마 쪽으로 간다든지, 기획 제작, 마케팅 등 뚫고 들어가기 힘든 영역에 대해서는 이미 마음을 접고 있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가끔 현장에서 필요한 인원을 구하려고 학교 쪽으로 전화를 하는데 주로 “남학생을 원한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쩌다가 여학생이 현장에 나가서 일을 하면 “굉장히 잘 한다”라는 칭찬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콜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심재명: 이제부터는 패널 분들께 각각 구체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세 친구>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이 나는데요, 놀라운 데뷔작이었고, 여성영화를 떠나서 리얼리즘의 지평을 넓히셨다고 생각해요. 임순례 감독님이 작업하시면서 꼭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또한 여성 감독 입장에서 상업영화에 대한 숙제를 어떻게 풀어내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임순례: 작업을 하면서 원칙적으로 삼는 게 몇 가지가 있는데, 가급적이면 세트를 잘 안 쓰고 웬만하면 헌팅을 해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배우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스태프도 부서별로 공평하게 기회를 주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충되어 불만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웃음). 상업영화와 관련한 부분은 주 교수님도 이야기하셨고, 오늘 토크의 주제이기도 한데 지금 현재 한국영화가 굉장히 활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감독들이 많지 않다는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제가 여성이기 이전에, 제가 가진 감성 자체가 상업영화하고 잘 안 맞아요. 하지만 그것이 관객들의 요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협을 하게 됩니다. 투자자나 제작자에게 큰 손해를 입히면 안 되겠다 라는 전제를 깔고. 사실상 상업영화에서 여성감독에게 기회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의 문제의 원인이 여성감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영화에서의 관객의 지형이나 산업의 지형 때문에 그러는 것이거든요.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블록버스터나 액션 대작과 완전 저예산의 영화 그 중간 지점이 없는 거죠. 여성 감독들이 강점을 보이는 지형은 사실은 200만~300만이나 중박 정도의 예산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정도의 영화인데 그런 중간 규모의 예산 영화들이 한국에서 제작될 수가 없는 상황. 그것은 영화를 다양하게 선택하지 않는 관객들의 기호의 문제도 있고 배급 시스템의 문제도 있습니다.
심재명: 문소리 배우님이 맡아 오신 역할들을 생각해보면 만만치 않은 여성, 앞서가는 여성들을 많이 맡아오셨습니다. 최근에는 홍상수 감독님과 작업을 많이 하고 계신데, 영화를 보면 문소리 배우로 인해 홍상수 감독님 영화 속 여자들의 상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영화에서 대단한 존재감을 보여주십니다. 최근에는 또 <여배우>라는 단편을 연출하기도 하셨죠. 그런 입장에서 감독과 주고받는 영향, 여배우로서의 여러 가지 생각들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문소리: <하하하> 때 홍상수 감독님과 처음으로 작업하기로 하고 통영으로 내려갈 때 제 친구들인 또 다른 여성영화인들과 얘기를 했어요. 친구들이 우려 및 부탁을 했어요. “제발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다”라고(웃음). 저는 "어. 직업도 있고 정신도 제대로 박힌 여자인거 같아"라고 대답을 했죠(웃음). 늘 많은 남자 감독들과 일을 할 때 가끔 그들의 판타지를 구현해내야 하는 그런 미션을 받을 때가 꽤 있죠. 판타지는 그냥 당신이 해결하면 안 될까?(웃음)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고,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내가 해내고자 하는 캐릭터는 정말 내가 느끼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애를 먹었던 적도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역으로 감독님께 부탁하고 구슬리고 어떨 때는 싸우고 그랬던 적도 꽤 있어요. ‘내가 스스로 주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야 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서 잘 발 딛고 서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에서는 누구의 첫 사랑, 누구의 판타지, 누구의 희생양일 수도 있고, 현실에서 사실 여성들이 그런 위치에 있기는 하죠. 그래서 그것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 캐릭터를 조금은 내 안에서 주체적으로 키워낼 때 결과적으로는 영화에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제가 아무리 작은 역할을 맡더라도 이것이 다른 여자배우들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심재명: 2013년도였나요, 문소리 배우가 100억 가까운 대작 <스파이>하고 홍상수 감독님의 저예산 영화에 동시에 출연해서 같은 해에 개봉했었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양극단을 오가는(?) 활발한 모습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임순례 감독님이 <와이키키 브라더스> 만드셨을 때 그 해 장편영화가 50~60편 정도 되었는데, 여성 감독이 만든 장편은 단 두 편이었어요. 2014년에는 일곱 편의 여성 장편영화가 나왔는데, 이것이 올해 만들어진 180편의 장편영화 중의 일곱 편입니다. 여전히 전체 제작 편수 중 여성 감독 제작 영화는 할리우드도 15%가 채 안 되는데, 저희도 한 10%가 채 안 되는 그런 상황이죠. 이례적으로 여성 장편영화가 단 한 편밖에 안 나온 해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2004년에 변영주 감독의 <발레교습소> 였죠. 이 영화를 김미희 대표님이 만드셨는데 대표님은 여성 제작자와 여성 감독과의 작업에 있어서 어떤 것들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제작자로서 여성 감독과 일하는 것에 있어 어떤 의무감이라든가 책임감 같은 것이 혹시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김미희: 변영주 감독님은 <밀애>로 처음 만났고 그 다음에 <발레교습소>를 했는데, 제가 가졌던 제작자로서 기준이 원래 신인감독과 두 편은 기본적으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영화가 흥하든 망하든. 사실 남자 감독님과 일 할 때와 여자 감독님과 일할 때 다른 점이 있긴 합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간에 여성성을 갖고 있는 감독님과 저하고는 굉장히 잘 맞아요. 그러나 남성성을 갖고 있는 감독님과 일하면 소통에 있어서 약간... 영화라는 것이 한 명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자부심을 모아서 영화를 만드는 것인데 이때 감독의 역할은 이들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굉장히 잘 해야 하는 것이죠. 남성성이 강한 감독님들 같은 경우 저에게 절대 ‘설득’의 과정을 거치려 하지 않아요. 여성 감독님을 포함해 여성성이 강한 감독님들은 서로를 설득하려는 과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을 할 때 훨씬 즐겁고 일의 진행이 잘 됩니다. 단순히 수다가 아니라, 일을 하는 방식인 것이죠. 저는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스타일 문제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여성 감독님들이 많이 좀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죠. 그렇지만 제작자로서 여성 감독을 배출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감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단지, 저는 여러모로 편협한 것이 싫거든요. 제가 코미디로 데뷔했지만 스릴러나 그 밖의 다른 것도 시도하는 것처럼 콘텐츠를 다양하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제작자로서 있죠. 그래서 저는 여성감독 뿐 아니라 여성 시나리오 작가들과 작업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 분들과 일할 때 굉장히 즐겁고 좋아요.
심재명: 저는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입장이지만 ‘비평이 사라진 시대’, 학교에서 이론을 공부하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안타까운 생각을 가집니다. 창작을 하고 노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평가하고, 이론화하는 것들에 대한 중요성도 분명히 있거든요. 주진숙 교수님은 그 부분에 있어서 이론 전공자시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입장인데 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주진숙: 바람은 크죠. 그렇지만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론이나 비평이 필요한 시대인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을 할 수가 없죠. 실제로 소수의 비평가들만 활동을 하고 있죠. 이론이나 이런 것도 많이 위축이 되어 있고. 저는 굉장히 행운이어서 한국영화가 르네상스 시기를 맞이하고 세계적으로 조명 받고 했던 시간 동안 학교에 있어서 굉장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이 돼요. 굉장히 운이 좋았죠. 그리고 그런 때였기 때문에 굉장히 똑똑한 학생들이 중앙대에 많이 들어오고 했었죠. 그러나 그 많은 똑똑한 학생들이 막상 영화이론을 공부하고 나서 갈 데가 없고, 이론이나 비평을 필요로 하는 그런 학교조차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요즘 ‘영화학과’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학교보다는 ‘미디어학과’나 ‘콘텐츠’라든가 ‘디지털’ 이런 말과 합쳐진 학과이름으로 바꾸는 사례가 더 많죠. 그러다 보니 정말 강의할 자리도 찾기 힘든 현실이 됐고. 그래서 저는 바람이야 크지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까 이제 영화의 황금시대는 갔는가. 라고 그냥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한국영화 시장이 커지고 관객 수도 많아졌지만 사실 한국영화가 어떤 면에서는 많이 쓰러졌다고 생각해요. 좋은 영화가 나오기 힘든 구조이고. 일례로 아까 문소리 배우나 임순례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중간 정도 규모의 영화들이 있어요. 어떤 학자들은 스마트 시네마(smart cinema) 라고도 하는데, 여성 감독들의 감수성이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나라 시장에서는 그런 게 다 죽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고요. 우리가 이 모임을 처음 만들었을 때만 해도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여성’에 방점이 찍혀있었는데 점점 ‘영화인’으로서 경제적 문제라든가 하는 것들을 고민하게 되는 상황이죠. 이런 것이 바뀌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심재명: 문소리 씨에게 궁금한 게, 문소리 배우님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던 때가 2004년, 2005년, 2006년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중간 규모의 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던 시기였었죠. 지금은 사실 객관적으로 문소리 배우님도 나이가 들었고(웃음), 선택하시는 영화에 있어서도 그때와는 다른 변화를 느끼실 것 같아요. 그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돌파하실 생각이신지.
문소리: 돌파가 되겠나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죠(웃음). 이런 생각을 많이 하죠. 내가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는 영화가 없나? 아니면 워낙 남자들이 나오는 영화가 많아서 내가 할 수 없나. 30~40대 여성들이 메인 관객이 되면서 영화시장이 그렇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이제 40대 여성이 할 수 있는 영화 <관능의 법칙>이 나왔을 때 너무 반가워서 “뭔들 상관없어. 이건 해야 겠어” 그런 마음도 사실 있었어요. 저는 ‘어떻게 돌파를 해 나가야 할까’ 이런 생각만 하는 것은 별로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차라리 “변화하지 않을까?” “이대로 계속 가진 않겠지” 라고 낙관적인 생각도 해보고요. 주변에 많은 여성영화인 친구들과 앞으로 어떤 것을 해볼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많이 해요. 제가 <여배우>라는 단편을 만들면서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 한국영화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다가, 한국영화로부터의 사랑이 식으니까 “왜 날 사랑해주지 않는 거야?”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나도 그만한 사랑으로 돌려주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할까? 라는 생각을 더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으로 공부도 하고 있고 그러는 건데. 잘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심재명: 이럴 때일수록 여성들 간의 연대도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김미희 대표님도 두 편의 영화를 여성 감독들과 함께 진행하고 계시고 그런데요. 실질적인 방법에 대해 한번 말씀을 나눠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젠더 쿼터 시스템’이라는 게 있어요. 미국이나 유럽에서 출발한 제도이고 주요 기업이나 정치권, 교육계 등 사회 전반에서 이것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도 여성할당제가 있는데 그것이 주로 공무원이나 교사 이런 쪽 중심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영화비즈니스나 문화계에서는 자율에 맡기다 보니까 이런 것이 법제화되고 있지 않아요. 영화계에도 이런 여성할당제 같은 것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예를 들면 여성 감독의 영화나 전체 구성 중에 여성 스태프 수가 40%를 넘는 영화에 한해서, 마치 어떤 지역에서 촬영을 할 경우 그 지역 영상위원회에서 인센티브를 주는 것처럼, 지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이런 생각을 해봤거든요. 좀더 구체적으로 여성영화인의 연대를 해나갈 수 있는 제도적 법적 지원에 대해 조심스럽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들을 듣고 이 자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주진숙 선생님부터 부탁드립니다.
주진숙: 이 자리에 와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중대에서 여성감독이 나온 게 이번에 <셔틀콕>의 이유빈 감독이 처음이네요. 하지만 다행히 앞으로는 굉장히 많이 나올 것 같아요. <셔틀콕>이 그렇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는데 그 감독이 말하길, 자기로서는 이 영화가 굉장히 상업적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결과가 그랬다는 것이죠. 그런 것처럼 여성 감독이 생각하는 ‘재미’란 주류가 생각하는 ‘재미’와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정서라든가 그런 재미를 어떻게 대중적으로 녹여내느냐가 문제일 텐데. 여성영화인모임이 연대를 하자면, 정말 할 일은 많은 것 같아요. 단체가 출범할 때 하고자 했던 일들은 거의 다 한 것 같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하기도 했는데. 다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여학생들이 현장인력으로 진입할 때 장벽이 너무 높다는 것에 기인해서 촬영이라든지 조명이라든지 하는 영역에 있어서 우리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이들이 실제 현장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여학생이나 일반 여성이나 상관없이 새로 영화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여성영화인들에게 오리엔테이션을 시켜준다든가, 진입할 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해준다든가 하는 것을 우리 단체에서 하는 것은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배와 후배가 만나는 자리를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심재명: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이십니다.
임순례: 지금 주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대부분 현장에서 새롭게 스태프를 구성할 때 그 팀을 구성하는 조감독이나 퍼스트가 대부분의 경우 남자잖아요. 남자는 자기 밑의 조수들을 구성할 때 자신과 좀더 친밀한 사람들로 구성하다보니까 주로 남성 위주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주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때 어떤 연결고리로서도 (여성영화인모임의 역할이) 중요하겠고. 대학에서는 훌륭한 여성들이 많이 배출이 되는데 이들이 현장으로 진입하는 게 지속이 안 될까 라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는데, 여성이 처한 특수한 상황 중에 결혼과 출산, 육아 이런 것들이 많이 장애가 되는 것 같아요. 아무리 많은 경력이 있다 하더라도 중간에 이러한 이유로 현장을 떠나있다 보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경력 단절이 발생을 하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저희가 뭔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고요. 또 하나는 지금 현재도 많은 여성 제작자 분들이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이 부분이 좀더 강력하게 성장을 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서 <카트>라는 영화가 심재명 대표님이 아니면 사실 제작되기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거나 산업에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친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분야에 들어오는 것이 힘들고, 들어와서도 힘들 것 같아서 지레 겁먹거나 지레 포기하는 것 보다는 우선 부딪혀 본다든지 , 실전에서 도전을 해본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소리: 어렸을 때는 더 몰랐던 것 같아요.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더 많은 것을 배웠는지도 모르지만 왜 여성영화인들이 연대를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마흔이 되어서도 여전히 삶이 빡세고 힘들다 보니 이러한 여성영화인모임 같은 존재가 괜히 위안이 되더라고요. 산후조리원 동기 모임도 그렇게 큰 위안이 되는데, 여긴 어떻겠습니까(웃음). 정말 문득문득 선배 여성영화인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존재 자체도 감사하지만 많은 한국의 남성영화인들이 못해내는 일들을 굉장히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것들을 이제야 더 크게 깨닫고 느끼고 감사하게 생각이 됩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런 연대가 굉장히 큰 위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김미희: 저는 여성들의 권리나 권익을 위해서는 저희도 능력이나 강함을 갖춰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물리적인 힘이나 그런 게 아니라. 요즘 친구들 중에 한 작품이나 두 작품 하고 사라지는 친구들이 너무 많거든요. 저는 기본적으로 제작 파트에 필히 여자 스태프를 꼭 넣습니다. 왜냐하면 여자 스태프들이 갖고 있는 장점들이 ‘프로듀서’라는 직책과 너무 잘 맞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에요. 저랑 같이 일했던 많은 훌륭한 여성 프로듀서들이 갖고 있던 장점들 중 하나가 근성이었어요. 그런데 요즘 친구들에게는 그런 근성을 못 발견했어요. 일이 힘들면 곧바로 그만둬 버립니다. 일이 힘들면 당연히 지칩니다. 이럴 때 바로 그만두기보다는 그 일에 대해 조언이나 이런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역할을 여성영화인모임에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성이니까” 이런 전제조건이 너무 싫거든요. 이런 편협한 사고보다, 영화라는 산업 안에서 어떤 자격과 조건을 갖고 권리를 추구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재명: 15주년 기념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는데, 앞으로 15년 간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숙제를 많이 받게 된 자리 같아요. “우리끼리 열심히 하자” “우리끼리 연대하자”도 중요하지만 이런 계기를 통해서 공적 지원이나 제도화에 대한 노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2014년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많은 실망을 하기도 하고 또 많은 희망을 보기도 했던 것 같아요. 특히 임순례 감독님의 <제보자>를 보면서 이렇게 우리 사회 현실을 돌직구로 표현한 세련된 상업영화를 여성감독이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여성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어요. 더 나아가 여성들끼리의 연대를 얘기한 <카트>도 잘 될 줄 알았어요(웃음). 물론 80만도 굉장히 소중한 수치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이야기가, 여성들의 연대를 다루는 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만큼의 성과나 용기를 더 줬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치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서 후배 여성영화인들에게 어떤 일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고 실행할 생각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소중한 말씀 해주신 네 분에게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사진 및 정리: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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