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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보라]

갑을공화국과 돈의 상관관계에 대한 짧은 통찰, <청소시간>




‘갑질’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계약문서에서 각각 계약자와 피계약자에게 배정된 건조한 단어였던 ‘갑’과 ‘을’이 지금은 한국사회의 풍경을 풍자하는 단어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때 두 단어는 권위적인 상하관계 또는 주종관계처럼 맺어진 고용 및 각종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얼마 전 ‘땅콩귀항’으로 유명해진 조현아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을 확인한 사건 중에 하나일 것이다. 2014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소개된 이스라엘 단편 <청소시간>은 이러한 갑을의 풍경을 짧은 에피소드 안에서 성찰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큰 주택을 청소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딸이 들러서 일을 돕게 하고 있는 모양이다. 대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딸은 아직 천방지축 기질이 역력하여 주인집에 있는 음식을 꺼내먹고 집 물건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엄마는 처음에는 저어하지만 결국 딸이 쥐어주는 마이크를 잡고 작은 연설을 시작한다.



모녀는 아마도 이주노동자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엄마는 우선 더이상 여성이나 아동에 대한 학대가 없고, 원하면 언제든 일할 수 있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돈밖에 없다는 코멘트를 덧붙인다.그녀의 이 작은 연설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어리고 밝은 딸이 노래하는 랩의 흥겨운 리듬보다 엄마가 차분하게 내뱉은 몇 마디의 단어가 주는 울림이 더 통쾌하다고 할까? 엄마의 짧은 연설이 가진 통찰력에 영화를 보는 얼굴에 미소가 슬쩍 그려진다. 이스라엘에서 커가는 아이들에게 이제 모든 문제는 돈밖에 없는 것 같다. 아니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거의 모든 문제는 돈처럼 보인다. 



이러한 돈이란 것의 실체는 엄마가 실수로 집안의 물건을 파손하게 되면서 드러난다. 처음에는 자신의 실수를 숨기고 모르쇠로 일관하려던 그녀는, 집주인이 들어오자 어쩔 줄 모르며 엄마를 달래려는 딸과 집주인이라는 존재가 주는 불안을 외면하고 홀로 짧은 고뇌의 시간을 가진다. 그 시간동안 이 여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닥쳐올 일을 감당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을까? 어떻게든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있었을까? 그녀는 어떻게 이 위기를 겪게 될까? 섬세하게 포착된 장면들 때문인지, 갑을관계의 실제를 잘 알아서인지 그녀가 집주인에게 다가가는 걸음 걸음에 같이 마음을 졸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여성은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고백하기를 택한다. 변명으로 살을 붙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숨기지도 않고 말이다. 물론 사실을 확인한 주인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른다. 거기에 대고 그녀가 말하는 해결책 역시 매우 담백해서 당황스럽다. 그녀는 자기가 여기서 계속 일하면서 손상된 물건을 배상하겠다고 말하고, 주인은 이에 할말을 잃고 자리를 뜬 것이다. 

엄마의 짧은 고뇌에 이어진 발언이 너무 솔직담백해서 당당해 보이기까지 하다고 해야 할까? 그녀의 작은 연설처럼 그녀가 이 사태를 꿰뚫는 바가 매우 정확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문제는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다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일하고 싶고, 고장난 물건은 배상하면 된다는 것이다. 무언가 '갑질'을 할 태세의 집주인이 아무 대답 없이 황망하게 장면에서 사라지는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 통쾌하다. 



짧은 영화지만 전반부에 가볍고 명랑하게 돌아다니던 딸과 툴툴거리며 잔소리를 잇던 엄마의 태도는 후반부에 들어 반전된다. 엄마의 침착한 태도는 현실에 대한 통찰로 단단해지고 딸을 이끌며, 딸은 조용히 엄마와 발걸음을 같이 한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그 돈이란 그저 화폐인 것이 아니라 귄위와 주종관계가지 덤으로 매개하고 있는 것 같다. 엄마의 작은 연설에서 사라졌다고 하던 신분과 억압, 그리고 폭력은 말 그대로 사라졌다기 보다는 돈 아래로 숨어들어 통합되어 버린 것 같다. 돈은 신분이기도 하고, 폭력이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자격이 되려고 한다. 

그러니 조현아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녀는 자신의 자격을 행사했을 뿐인데 말이다. '땅콩귀항' 사건을 폭로한 대한항공 직원 '을'의 고발은 돈이 부여한 여타 자격의 부당함을 공개했기 때문에 '갑질'에 대한 사회의 처벌을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청소시간>의 엄마는 돈이 매개하는 것을 철저하게 사물의 값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의 '갑질'을 허용하지 않는 담백한 거래를 제안함으로써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부의 어깨에 무전취식 하는 '갑질'을 드러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모녀의 내일도 여전히 갑을관계를 지고 있을 것이며 수많은 우리의 모녀들 역시 아마 많은 시간 그녀들처럼 갑을 관계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쌓아가겠지만, 이 작은 단편 영화의 통찰이 엄마에서 딸에게로, 그리고 우리 관객과 사회로 차츰 흘러들어 허세와 갑질의 기름기를 씻어내리는 담수가 되면 좋겠다. 



* 소개된 영화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카이브 보라를 통해 대여 가능합니다. 


채희숙 / 아카이브 보라 담당

hp) www.wffis.or.kr 또는 tel) 02-583-2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