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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에디토리얼



故박남옥 감독을 기리며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 가자 완전히 무음이 되었다. 객석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누구 하나 항의를 하거나 소음을 내지 않은 채 독순술을 부리면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화는 소리없이 흘러가다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마지막 장면 또한 소실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던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자 아주 긴 박수를 쳤다. 불완전한 영화, '사라진' 과거, 손상된 사운드와 필름은, 그 극장에서 관객이 함께했던 침묵의 시간을 통해 복원되고 완전해진 듯 했다.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여성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미망인'(1955, 박남옥 감독)을 함께 본 관객들은 숨겨져 있었던 최초의 여성감독 영화를 발굴한 현장의 목격자가 되었고, 사라진 과거를 스크린의 빛을 통해 현재로 불러들인 역사가가 되었다.




'미망인'의 감독인 박남옥(1923~2017)은 비평가이자 기자였으며 영화광이었다. 배우 김신재(1919~1998)를 좋아했는데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삶을 살아내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박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인 이보라와 결혼했다. 이보라는 '미망인'의 시나리오를 쓰고, 둘 사이에 딸 하나를 남긴 채 이혼했다. 친 언니가 제작비를 대고, 갓난 아기였던 딸은 엄마의 등에 업혀 엄마가 연출하는 촬영 현장을 함께했다.


박 감독은 현장 스탭들의 식사를 손수 해 먹였다. 모자란 제작비를 융통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촬영을 중단하고 발을 동동 굴러가며 투자자도 만났다. 하지만 그렇게 완성한 영화는 개봉 당시 한 개의 극장에서 나흘 동안 상영하고 간판을 내렸다. '최초 여성감독의 영화'라는 포스터 홍보 문구는 영화의 흥행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지금의 여성 감독들도 그렇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이혼을 한 감독에게 두 번째 영화를 연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박 감독은 그 후 외동딸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망인'의 원제는 사실 '과부의 눈물'이었다. 개봉 당시 포스터에는 '미망인'이라는 제목이 부제처럼 괄호 속의 한문으로 작게 표기되어 있었다. 영어 제목도 '더 위도우'(The Widow)로 동일했다. 사실 여성영화제 상영 당시 '과부의 눈물'이 아니라 왜 '미망인'이라는 제목을 택했는지, 영화를 발굴한 한국영상자료원은 왜 이 영화를 먼저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건지 논의해 볼 여지가 있다. 미망인(未亡人)은 남편을 따라 '아직 죽지 못한 아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모성 멜로드라마'. 미망인이 자신의 어린 딸을 이웃집에 맡긴 채, 극장 간판 등을 그리는 오늘날로 말하면 옥외 홍보 디자이너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에게 배신을 당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낮은 계급의 미망인이 가부장제에서 겪는 성의 경제학을 서울이란 도시를 배경으로 펼치고 있으며, 모녀 사이 돈 때문에 갈라질 수밖에 없는 관계로 영화는 학교 가기 싫어하는 딸의 미디엄 쇼트 위로 '이웃에 이러한 미망인이 있었다. 수렁에 빠졌을 때라도 그는 해바라기였다'라는 자막이 흐르며 시작한다. 미망인 엄마인 신(이민자)"돈 안 갖고 오면 학교 오지 말래"라며 서 있는 딸(이성주)을 억지로 학교에 보내며 "그 놈의 학교는 툭하면 돈이야"라고 눈물짓는다. 이 첫 장면은 조금 과장하면 모성 신화의 허구성, 경제 결정론에 의해 무참히 깨진 모성의 이야기가 앞으로 전개되리라는 걸 짐작케 한다.




미망인은 남편 친구인 이사장(신동훈)이 준 돈으로 의상실을 개업하는데, 이웃의 술집 아가씨는 미망인에게 자신처럼 남자를 이용해 돈을 얻으라"고 조언한다. 미망인이 함께 살기로 결심한 ''(이택균) 또한 낮은 계급의 남성으로, 미망인첫사랑(나애심)이사장의 아내(박영숙)를 오가며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한다. 결국 마지막까지 유지되는 관계는 미망인에게 한 때 연정을 품었던 이사장, 그리고 택과 바람났던 이사장의 아내, 즉 유한계급 부부 뿐이다.


미망인이 연루되어 있는 모든 관계는 불안정하고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래서 불행하다. 돈이 돌고 돌듯이 인간관계의 정 또한 돌고 돌지만 그 떠도는 정을 안정시키는 것 또한 돈이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미망인이라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주변 관계도를 통해 1950년대 여성이 처한 곤궁한 현실을 조망한다. 또 사회 문제를 여성 개인의 캐릭터나 심리의 문제로 치환하지 않은 리얼리즘 영화라 할 수 있다.


박 감독은 2001년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을 통해 역사적으로 다시 한 번 조명됐다. '아름다운 생존'의 감독은 임순례였고, 여성영화제에서 이전에 일을 했다는 이유로 나는 조연출을 맡았다. 한국영화사를 여성의 관점으로 관통해 보자는 기획 의도에 걸맞게 당시에 많은 여성 영화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의미 있는 작업에 동참한다는 마음은 과거에 대한 호기심과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동질감이 섞여 여성영화인으로서 자긍심이 되었다.


<故박남옥 감독>


박 감독이 후배 감독 중 임순례 감독을 무척 아꼈던 기억이 새삼스레 난다. 2008년 제10회 여성영화제에서 후배 여성감독을 독려하기 위해 박 감독의 기부로 마련했던 '박남옥 영화상'에 임 감독을 선정해 상을 주신 바 있을 정도로 아꼈다. 당시 박 감독은 임 감독에게 "나를 닮아 옛날에 인물이 없었는데 유명해져 인물 났다"는 뼈있는(?) 축하 메시지를 화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임 감독은 현재 박 감독의 일대기를 구술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 두 여성 감독의 세대를 넘어선 우정 자체는 여성영화인 모두에게 소중한 일이다.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애연가이자 화통한 여장부였고 담배만큼이나 영화를 사랑했던 박 감독의 살아생전 소원은 자신의 두 번째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비록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97년 당시 영화제 극장을 가득 채웠던 박 감독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공기가 감독님 영면에 따뜻한 숨이 되었길 바란다.


당신의 영화는 스크린이 뿜어낸 그 빛 속에서 영원할 겁니다.


김선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본 컬럼은 영화전문지 매거진M에도 기고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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