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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10회(2008) 영화제

<4.16> [행사 스케치] 임순례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행사 스케치] 임순례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영화제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행사, 마스터클래스가 16일(수) 아트레온 5관에서 열렸다. 이번 마스터클래스의 주인공은 최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은 임순례 감독. 임순례 감독은 단편 <우중산책>으로 데뷔한 후 저예산 장편영화와 단편영화, 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형식과 제작 시스템을 거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세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 그의 영화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면서도 냉정한 현실 인식을 놓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를 연출하면서 느낀 점, 영화를 제작하게 된 동기와 초점 등 그가 풀어놓는 솔직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관객들과의 질의응답 내용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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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갈증을 느껴 파리로 유학, 원없이 영화만 봤던 4년”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했기에 영화에 대해 공부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 대학 3학년 때 불란서 작가주의 영화를 접했다. 그 당시는 한국 영화 시장이 상업적으로 발달한 시기가 아니었다. 임권택 감독, 배창호 감독 등 소수의 감독들만 활동하고 있는 시기였다. 여성감독은 특히 드물었다. 여성감독의 시기로 따져보면 아마 암흑기가 아니였나 싶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느낀 순간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했다. 당시엔 주로 한 감독님 밑에 들어가서 오랜 기간 동안 연출부 생활을 하다가 데뷔하곤 했었다. 그런데 나는 한 감독님 밑에 들어간다는 것이 겁이 나기도 했고,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어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 때 한국의 영화학은 막 정착된 상태인만큼 깊은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텍스트 없이 공부한다는 것이 답답했다. 결국엔 영화에 대한 갈증으로 예술 영화를 공부하기에 가장 좋다는 파리로 갔고 4년간 원없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제에서 줄줄이 매진되던 작품들이 개봉만 하면 참패”
여균동 감독의 연출부에서 일하다가 94년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우중산책>으로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장편영화인 <세친구> 시나리오를 썼다. 내용이 상업적이지 못해서 투자자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서울단편영화제 측에 찾아가서 도움을 부탁하는 등 나는 PD겸 감독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 당시 4억 3천만원의 제작비를 받았다. 보통은 제작비가 모자라기 마련인데 딱 200만원이 남아서 마지막으로 MT가서 다 썼다. 나는 프로듀서의 기질이 좀 있는 것 같다.(웃음)
<세친구>가 1회 부산영화제에서 3회 상영했는데 모두 매진됐다. 이 결과에 기대를 걸고 극장에서 상영했는데 3만명 겨우 넘었다. 2001년도에 완성한 <와이키키 브라더스> 역시 전주, 부산영화제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상영했더니 전국 관객 10만명 정도로 역시나 결과가 좋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작품성 있는 작품들이 극장에서 빨리 내려서 ‘와라나고’라는 이름으로 ‘예술영화 살리기 관객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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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를 혹사시키는데 있어서는 마음이 약한 편”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첫 촬영 장면이 옷을 다 벗고 해변가에서 뛰는 장면이었다. 크랭크인 들어가고 첫 촬영 시작했을 때가 10월이었다. 첫 촬영부터 옷을 벗기고 뛰게 해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다행히 배우들이 잘 따라줘서 3번 안에 O.K했다. 영화를 찍다 보면 배우를 어디까지 혹사시킬 수 있는지 고민한다. 난 사실 마음이 약한 편이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 배우들이 감기 들거나 하면 “애 하나 감기 걸리게 해서 뭐 얼마나 달라질까”싶어 그냥 O.K한다. 근데 프로듀서들을 보면 12월에 물에 들어가는 장면도 10번 이상 시키더라.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저런 건 배워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좀 더 시킬 걸’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반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는 너무 심하게 혹사시켜서 불평도 많았다.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엔딩 장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내가 처음 생각했던 엔딩 장면은 고속도로에 트럭이 지나가며 오지혜가 “여수 아직 멀었어?”라고 묻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스텝들이 보면서 임팩트가 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다시 생각했던 장면이 오지혜씨의 노래 장면이다. 아마 오지혜씨의 노래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순간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엔딩 장면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장안동에 있는 가라오케를 빌렸는데 주인들과 5시까지 촬영을 마치기로 한 상태였다. 그러나 보통 영화 찍는 사람들은 시간 개념이 없는 편이라 나 역시 한 6시까지는 찍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좀 늦어지니 속칭 ‘깍두기 아저씨’들 표정이 변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제작부는 나에게 얼른 찍으라며 독촉했다. 엔딩 장면이라 중요했음에도 급하게 끝낼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 장면에서는 비루한 삶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뉘앙스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그 장면에서 희망을 발견했다고 하더라. 이유를 물어보니 이얼 이라는 배우의 표정이 너무 밝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빨리 끝내야 하는 사정 때문에 디테일하게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다.

“단 3만 명이 보더라도 2만 5천명이 기억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우.생.순.>이 큰 사랑을 받아서 매우 행복했다. 무대인사 다닐 때마다 좌석이 꽉  차 있는 것을 보며 뿌듯했다. 코믹한 장면이 많아서 찍는 과정에서도 행복했다. 그러나 내가 영화를 시작한 이유가 ‘대중성’은 아니다. 100만 명이 영화를 보고 99만 명이 극장 문을 나가는 순간 잊어버리는 영화보다는 3만 명이 보더라도 2만 5000명이 기억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우.생.순.>을 만들면서 많은 관객들이 보면서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의미와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영화의 기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다 갖추기가 쉽지만은 않다. 내가 하려는 것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대중 영화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현실을 버틸 땐 초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한국 영화산업은 점점 축소되고 있고 갈수록 힘들어진다. 여감독이 되는 것도, 여배우가 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 내가 지녔던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면 주변 상황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나의 초심은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다’라는 마음이었다. 난 그 초심을 아직 가지고 있고, 내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설사 흥행에서 참패하더라도 불행하지 않았다. 초심을 잃지 않고, 어려운 순간마다 초심을 돌이켜본다면 어려운 현실을 버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웹데일리 자원활동가 김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