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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스태프의 눈 : 함께 일한 어제를 추억하며, 오늘도 ~ing


Herstory에 연재될 글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08년 10주년을 맞아 제작했던 기념 백서 <<여성, 영화 그리고 축제!>>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기념 백서 <<여성, 영화 그리고 축제!>>는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_보다 _ Records>에서는 1회부터 10회까지 개/폐막식을 비롯한 국제포럼 등의 행사와 상영작들이 총 망라되어 있으며 <_말하다 _쓰다>는 여성영화제의 10년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있습니다. <_Perspectives _Herstory>는 <_말하다 _쓰다>의  영문버전입니다. 
Herstory는 여성영화제의 역사를 기록한
<_말하다_쓰다>에 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눈물 - 제2회 199년 4월 16일 7시, 개막식
개막식이 시작되었지만 개막작 <행복의 거리>는 아직 상영관에 도착하지 않았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사전 기술점검에서 개막작 필름에 문제가 발견됐고, 급하게 감독인 중국의 리 샤오홍에게 연락해 또 한 벌의 필름을 직접 들고 와야한다는 절박한 당부가 전해졌다. 감독은 어렵게 필름을 확보해 개막일에 맞춰 가져왔고, 그녀는 개막식에 앞서 여유있게 식장을 밟았지만 세관에 걸린 필름은 밟아야 하는 많은 절차가 남아 있었다. 식이 끝나갈 무렵, “필름은요?” “영사실에 걸렸어, 간신히 맞췄다!” 라는 답변을 들었을 때란! 필름수급을 담당했던 스태프는 개막작이 시작될 때 가슴이 벅차 눈물이 핑~ 돌더라고 했었다. 스태프들은 그 눈물을 이해한다. 꾸욱 참고있다가 누군가 ‘툭’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터지고 마는 눈물을, 죽어라 열심히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침묵으로 대신 흘리는 눈물을 이해한다. 시작과 함께 끝만 바라보며 달리는 이 긴 마라톤은 언제나 종주하기까지 수 십 가지 인생의 맛을 느끼게 한다. 눈물은 뭉클 짭짤한 맛!

소통과 위로 - 제2회 1999년 4월 17일 밤 12시, 상영관
동숭아트센터 마당을 넘어 골목까지 길게 늘어선 줄은 언제나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자랑이었다. 매진사례가 이어졌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화제작은 볼 수 없었다. 화제작만을 모아 상영하는 심야상영의 경쟁은 더없이 치열했다. 이미 매진된 심야상영 티켓을 포기하지 못하고 혹시 빈자리가 생기거든 티켓을 사게 해달라고 밤 12시까지 기다리는 관객들도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영화제가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작품들이었으니 관객들이 가진 ‘놓칠 수 없다’는 마음도 절실했을 것이다. 자원봉사팀장을 맡고 있던 나는 좌석을 정리하고 뒤편에서서 영화를 지켜보았다. 내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는 첫 순간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놀라웠던 것은 나의 마음이 작은 감동과 즐거움에도 크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영관에 있던 대부분의 관객들이 나와 마찬가지였다. 관객들은 살아있는 대사에 통쾌해 하고 작은 유머에도 크게 웃었다. 조용히 영화를 보기보다는 환호와 박수, 때로는 야유를 보내며 영화관람에 동참하고 있었고 내게는 상영관에 사뭇 감동적인 아우라가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듯 보였다. 모두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소통하고 위로 받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름 영화광이었던 나는 영화보다도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에게 더 감동을 받았다. 수면부족으로 뻑뻑하던 눈이 촉촉해지고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지고 있었다. 보람차고 기뻤다. 이곳에서 일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즐겁지 아니한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노동과 땀방울 - 제3회 2001년 3월. 신사동 사무국
맥주와 생수를 협찬 받았다. “여러분, 맥주가 왔어요!” 라는 외침이 사무국을 채웠다. 신났고 좋았다. 행사기간을 포함해 준비하는 동안 목마름을 덜어줄 맥주와 생수였다. 하지만 한 시간 뒤에 우리는 맥주와 생수 상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났다. 층층이 나눠 서서 맥주 100상자를 나른 뒤였다. 뒤 이어 생수가 가득 든 상자가 50개쯤 남아있다는 비보를 들은 뒤였다. 얼굴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스태프들의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보이는 듯 했다. 내 팔다리처럼…… 그리고 내 옆구리처럼…… 그들의 옆구리도 땀이 찼으리라. 작업 후 맥주가 달게 느껴지는 것은 쓴 노동 때문이다.

유희 - 제5회 2003년 4월 18일 밤 12시, 폐막식 뒤풀이
새벽1시부터 집에 가야한다며 음악이 끝날 때마다 가방을 찾으러 가던 주유신 프로그래머는 새로운 음악이 나올 때마다 스태프들의 성화에 밀려 정열적인 춤을 계속 춰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 시간째 매번 무대로 돌아왔고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모두들 기분 숑~ 가는 거지! 아바의 ‘댄싱 퀸’이 시작되자 모두가 열광 했다. 나도 모르게 흔들어대는 팔, 다리, 머리를 가누기 힘들어 벽을 짚고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아! 아름답지 못할지언정 벽 춤은 짜릿했다. 축제가 끝난 뒤였다. 축제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스태프들의 파티는 시작된다.

디테일 - 제7회 2005년 1월 21일 오후 7시, 후원의 밤
식순이 분 단위로 세심하고 정확하게 나뉘어 담당자와 준비사항, 음향과 영상장면까지 도표로 그려진 후원의 밤 큐시트는 친목을 다지고 후원을 기약하기 위한 모임 행사의 것이라기보다는 생방송을 맡은 꼼꼼한 무대감독의 것에 아까웠다. 유럽의 어느 미술관이나 공연장에서 경험했던가? 번호표에 가방과 두꺼운 겉옷까지 보관했다가 가시는 길 고이 돌려드리는 서비스도 마련되었다. 참석자 체크 담당. 이름표 담당. 카드결재 담당, 음식 담당, 탁주 담당, 음식물쓰레기 담당, 후원회 가입신청서를 쓸 때 필요한 볼펜 담당자까지 정해졌다. 섬세한 여성 영화제의 후원회원들과 관객을 대하는 담당자들은 언제나 꼼꼼하게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의 확인을 거듭한다. 나는 여성영화제와 일하는 업체들이 얼마나 피곤할지 충분히 예상한다. 나조차 이따금은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힘! 아~ 그 섬세함의 힘!

책임 - 제8회 2006년 4월 8일 오후 5시, 아트레온 갤러리 개막 리셉션
만세! KBS ‘인간극장’에 출연 후 안 그래도 바쁜 일정에 온갖 청탁까지 밀려들어 한참 괴로우셨을 임지호 요리연구가를 사무국장님과 집행위원장님까지 나서서 어렵게 섭외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3시까지 음식을 준비해 이곳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5시, 연락이 두절되고 약속시간이 2시간 지났다. 갤러리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이대로 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훌훌 집으로 돌아가 보글보글 된장찌개에 저녁을 먹고 푹신한 잠자리에 든다면 그곳이 천국일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선 곳은 아트레온 13층. 시작시간이 다가오고 테이블만 덩그라니 놓인 개막식 리셉션장이었다. 손님들을 잘 드실 수 있게 대접해서 보내지 않으면 두고두고 마음 불편해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중국집에 전화해 “아저씨! 탕수육, 팔보채, 서른 개 그리고 자장면은 9시에 맞춰 면 따로 자장 따로 어쩌구…… 저쩌구…… ?” 해가며 미친 사람처럼 배달이라도 시켜야하는 것은 아닐까? 텅 빈 테이블과 200명의 게스트가 입장하는 리셉션장이 머릿속에서 엇갈리고, 세상이 캄캄했다.
다행히도 사무국장님과 통화가 된 임지호 선생님은 밀리는 도로를 달리는 중이셨고 6시 조금 전 식장에 도착했다. 그날 우리는 2시간 동안 한 순간도 서있거나 걸어 다니지 않았다. 3시간의 시간을 메우고 말끔하게 테이블을 준비해야 할 책임은 우리의 몫이었다. 곧 개막식을 마친 이벤트 팀이 도착했다. 이제 그들이 마이크와 음향을 준비하고 무대를 비우면 리셉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날 행사는 무리 없이 마무리되었다. 각 파트담당자들의 책임으로 완성되는 영화제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어느 누구하나 삐걱거리면 모든 게 틀어지고 만다. 그러니 내 몫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한다. 간덩이가 오그라들 새도 없이…… 10회 개막식 티켓교환을 담당한 스태프는 밤마다 개막식장이 텅 빈 꿈을 꾼대나 어쩐대나……

야근중독 - 제10회 2008년 3월 14일(개막 27일 전) 밤 10시 45분, 서초동 사무국
퇴근시간은 6시, 하지만 스태프들의 시계는 5시 45분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밤 11시를 향해 달리는 사무국의 벽시계가 오히려 그로테스크해 보인다. 빽빽이 들어앉아 컴퓨터를 두드리거나 전화확인에 야밤 회의까지…… 잠시 정상인의 지각신경이 작동한 나는 불현 듯 일어나 이야기한다. “뭐야~ 지금! 10시 넘었어. 왜 아무도 퇴근을 안하는거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무엇이 어쨌다는 거냐?! 일상인 것을…… 여러부운~ 제발 일주일에 네 번만 야근합시다!

내게도 영화제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올까?
영화제는 하나에서 열까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다. 8일 혹은 9일간의 축제를 위해 6개월, 1년을 일하다가 10일이 채 안 되는 행사를 불나방처럼 끝낼 무렵이면 공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축제기간 동안 헌신적인 활동을 보여주는 자원활동가들을, 매년 어김없이 영화제를 즐겨주는 매니아 관객들을, 함께 고생하며 크게 웃었던 스태프들과의 기억을 떠올리면 다시금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되곤 한다. 나는 지난 1년 6개월간 영화제를 떠나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 ‘영화제에 다시 합류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할 일이 있다면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미쳤어…… 살짝 중독되어 버린 것이냐?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울국제여서영화제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눈물, 소통과 위로, 책임과 완수, 웃음과 유희, 노동과 땀……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수십 가지 삶의 맛을 선사해주는 삶의 현장이자 애증의 동반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항상 이야기 되는 것처럼 영화인, 스태프와 자원활동가, 후원가, 관객들이 함게 만드는 영화제라는 사실은 처음 영화제를 경험했을 때는 생생한 감동으로,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힘으로 다가온다. 12년간 성장일로를 걸어 온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지만 이제까지 다져진 힘을 디딤돌로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해야 하는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다가오는 20회가 기대된다. 오늘에서 10년이 흐른 뒤엔 얼마나 더 신나는 축제가 펼쳐지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 스태프들에게 로망이 있다면 순수한 관객이 되어 마음 편히 영화제를 즐겨 보는 것이다. 내 이 다음엔 기필코 더 풍성해져 있는 서울국제영화제를 관객으로 돌아가 마음껏 즐겨보리라!


- 도은정  (IWFFIS 2회 자원봉사팀, 3~6회 홍보팀, 7~8회 행정팀, 10회 행사지원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