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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언니 영화제를 가다2_대만여성영화제


만여성영화제(Women Make Waves Film Festival)와 도쿄국제여성영화제(Tokyo International Women's Film Festival)는 올해로 각각 18회, 24회를 맞는 아시아의 가장 언니격인 여성영화제들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는 오랫동안 우정과 연대를 나눠왔으며 2010년에는 함께 NAWFF(Network of Asian Women's Film Festivals)를 설립하고 회원국으로 활동 중이다. 아시아 여성운동과 여성영화 역사의 한 기록이자 현재인 이 두 영화제의 방문은 즐겁고 감동적인 만남과 영화들은 안겨주었고 초짜 프로그래머에게 많은 가르침과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대만여성영화제는 대만 여러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열리는데 맨 처음 시작하는 도시 타이페이를 방문했다. 타이페이에서는 열흘동안 약 60편이 한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되며 대만 중단편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타이페이 상영이 끝나면 이후 타 지역 상영이 이어지고, 지역 상영에서는 작품이 추가되기도 한다. 대만여성영화제 네명의 프로그래머들은 일년 중 3개월만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배우, 영화,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는 인디펜던트 여성예술가들이다. 프로그래밍도 이런 프로그래머들의 성향이 반영되어 중단편의 독립영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의 비중이 높고 메인스트림 배급망에서 개봉하기 힘든 영화들이 다수를 이룬다.

인디펜던트, 열정의 에너지

 

타이페이의 메인 상영관은 시먼딩(맨 위 사진)에 위치한 신광 시네플렉스인데, 시먼딩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타이페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이기에 신촌을 메인상영관으로 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같이 북적이는 분위기를 상상했다. 하지만 신광 씨네플렉스는 시먼딩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날 따라 강풍이 불고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그런지 서울의 아트레온 보다는 대만 영화 <안녕, 용문객잔>(감독 차이밍량)의 무대인 오래된 영화관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극장 안은  열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관객들과 영화제 스탭들로 활기찼다. 극장 건물 안의 낡고 좁은 상점들을 한참 지나쳐 3층의 상영관에 다다랐을 때 맨 처음 눈에 들어 온 것은 상영관 바로 바깥에서 진행중인 관객과의 대화(GV)였다. 관객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거의 모든 관객들이 참여하여 격렬하고 집중도 높은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열정적인 분위기는 이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자격으로 감독과 함께 참여한 한국영화 두편의 GV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차성덕 감독의 <사라진 밤>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적극적이었다. 관객들 각자 이해한 부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끼어들기도 하면서 Q&A 위주의 GV라기 보다는 하나의 격렬한 토론이 되어 갔다. <사라진 밤>과 같이 상영되어  GV 게스트로 온 <Turtle and Tears>의 초우 써웨이 She-Wei CHOU 감독도 자신의 영화 이야기뿐 아니라 <사라진 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그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질문들에도 개입하면서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해 관객과 신나게 한바탕 떠드는 유쾌한 밤이 되었다. 
 
 

 

<레인보우> 상영 후 신수원 감독과의 GV(사진 좌), 상영관 바로 바깥에서 열리는 GV 세션(사진 우)

Movie, Film, Cinema 
 
<Turtle and Tears>에 대해서는 (아마도) 내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될 가능성이 크므로  '소녀, 거북이, 불쌍한 어머니와 싫은 아버지 그리고 반전' 정도의 키워드 이상은 말 하기 힘들다. 대신 내년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는 힘들지만 인상적인 작품들에 대해서는 이야기 해도 좋을 것 같다. 우선 재기발랄하고 사랑스러운 단편 <9 shot>(슈 신유 Hsin-Yu CHOU/2009)은 영화현장과 영화적 판타지 두 측면을 다룬 영화에 대한 영화로 구조와 의미가 간단치는 않지만 동시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웰메이드 코미디이다. 거기다 반가운 것은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에서 배우 이강생과 호흡했던 류이칭이 여배우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완연히 드러내며 젊은 여성감독과 멋진 콜라보레이션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턱 성형수술을 다룬 <Avoiding Vision>(첸 카이트 Kite CHEN/2010)은 제10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오버 더 힐>(서니 베르히만/2007)을 떠 올리게 한다. 수술 종목으로만 보면 <Avoiding Vision>이 좀 더 평범하게 보이지만 이 영화는 감독이 직접 수술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르다. 영화의 결론 역시 훨씬 유보적이다. <Meet the New Life-A Midwife, Liu A-Chi>(청 후이링 Hui-Ling CHENG/2011) 남한 여성들의 식민/탈식민 기억과 비교할 때 더욱 흥미로운 영화이다. 일본 식민지 시기 집안이 가난했지만 식민정부에게 발탁되어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의료 기초기술과 군사훈련을 받고 근대적 조산원으로 일하던 시절을 인생의 가장 즐거운 때로 기억하는, 일제 훈육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구령까지 그대로 기억하는 아치 A-Chi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남성과 여성 엘리트의 식민지/근대화 기억이 어떻게 다르게 각인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탈식민 과정에서는 어떻게 기술되지/기술되지 못 하는지에 대한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 주는 영화이다.
 
대만여성영화제에서는 영화 GV와 상관없이 마구 달려와서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영화의 제목과 (남성) 감독들의 이름들을 늘어 놓으며 필름메이커로서 진로를 묻는 소녀들을 종종 만나곤 했다. 당연히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럴 때 마다 어느새 한국영화가 아시아의 헐리우드, 아시아의 꿈의 공장처럼 되어버린 걸까... 기분이 묘해졌다. 그녀들이 롤모델로 여기는 한국 감독들을 페미니스트인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유명한 한국 감독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녀들처럼 영화 제작비 구하기는 항상 힘들며 돈도 그다지 많이 벌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비평과 연구, 상영운동 등이 한국영화의 복잡해진 관객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개입하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 멀리 나아가는 문제이겠지만, 영화제와 관련해서 부지런히 좋은 프로그램 마련과 상영에 힘써 적어도 소녀들이 멋진 한국여성감독 롤모델 정도는 발견 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대만을 떠났다. 


- 황미요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