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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씨네 페미니즘 학교 2015, 열린 강좌 후기 - 스티어 프레드릭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카이브 보라에서 운영하는 씨네 페미니즘 학교는 올해 8월에서 10월초까지 진행됐습니다. 10주 동안 매주 다른 여성 영화를 상영한 후 교수, 운동가, 연구원, 국회의원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의 발표를 듣고 토론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때 관람하지 못했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였고, 영화와 관련된 사회 이슈에 대하여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강좌를 들으면서 주제가 다양한 만큼 각 강좌 사이 어떤 ‘틀’을 잡기가 어려워 불만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보편성은 오히려 씨네 페미니즘 학교의 제일 중요한 장점인 것 같습니다. 성차별이 특수한 이슈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노동, 가정, 법, 정치, 그리고 신체와 성까지 삶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제일 인상 깊은 강좌는 <아니타 힐> 상영 후 성희롱 법에 대해 토론을 했던 첫 강좌였습니다. 1990년대 크래런스 토머스는 대법관 후보였는데, 그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을 때 동료였던 아니타 힐 교수가 자신이 성희롱 당했음을 진술했습니다. <아니타 힐>은 상원 청문회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당시에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의식이 매우 낮았으므로 남성만으로 구성된 상원 청문회는 반복적으로 힐에게 사건과 무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 성희롱 사건을 통해서 정치, 성별, 인종 등 복잡하고 서로 겹치는 권력관계들이 얼마나 정의를 방해할 수 있는지 영화에서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결국 크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52 대 48로 선발되었으나 아니타 힐의 청문회로 인해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고, 다음 선거 때는 그 전에 남성밖에 없던 청문회에 여성 의원 수가 급증한 바 있습니다. 

김지혜 교수님이 <아니타 힐>상영 후 강좌 및 토론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교수님은 1990년대의 미국 사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하여 이를 국내 현황과 연결하셨습니다. 현재 성희롱 예방 법률이 부족하고 불충분한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심각한 현실입니다. 강의에서 <남녀고용평등법> 을 검토하던 중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법’이라고 하면,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많은 법률, 그리고 성희롱에 관한 법률들도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사람’은 전 사회가 투표해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각 건의 판사가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는 판사의 주관적인 입장이 투입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 부유층 남성인 판사는[각주:1]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상상할까요? 직장에서 음란한 이야기, 외모 평가, 원치 않은 접촉에 대한 성희롱 피해자의 굴욕감이나 수치심을 얼마나 공감할까요? 분명히 여성이라고 해서 퇴행적인 고정관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이라도 평등한 성별 의식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의 경험을 말할 수 없지만,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젠더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인 페미니즘은 공익에[각주:2]  남녀가 동행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입니다. 씨네 페미니즘 학교에서의 대부분의 강좌를 통해서 여성과 청년 노동 운동, 성소수자 인권과 보호시설, 전쟁의 역사와 여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많이 배울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문제 의식을 조금 더 개발할 수 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강좌는 저의 개인적인 관심사와 조금 달랐지만, 관심이 가지 않던 주제에 대해서도 배우면서 제가 갖고 있었던 기존의 관점이나 반응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흥미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수강생도 그랬을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교육의 목적인 ‘다시 보고, 다르게 보기’인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씨네 페미니즘 학교에 참여하면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같이 봉사활동 했던 친구도 볼 기회가 되었으며 2014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알게 된 친구도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게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사회 의식을 계속 개발할 수 있고 항상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어서 유익한 경험이었으나, 더 평등한 사회와 문화를 향하자면 페미니즘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희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아주 효과적이고 유익한 기획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영화제에서는 성차별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되고 여성 문제를 다루는 영화도 많이 상영되면서 여성주의를 잘 모르는 대중적인 관객들도 많이 참석합니다. 예를 들어 올해만에도 극장 개봉한 <카트>, <도희야>,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거짓말>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정확한 강좌계획서가 없더라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참석하는 대중관객에게 공지를 제공하면, 씨네 페미니즘 학교에 더 많은 사람이 참석하고 더 넓은 대중이 메시지를 얻는 데 중요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주 동안 참여한 “씨네 페미니즘 학교”는 우리 사회의 현황과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제 유일한 후회는 강좌를 몇 개 빠져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문화에서 성차별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치는지 깨닫게 되면서 성평등 의식을 조금 더 개발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법, 사회, 문화가 서로 겹치면서 성평등을 이루자면 이 상호 작용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자면 성차별에 비롯된 수많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합니다. 엄청난 일이지만, 성평등 사회를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씨네 페미니즘 학교는 성차별에 대한 의식을 키우면서 더 평등한 사회와 문화를 실현하고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스티어 프레드릭


  1. 1) 사법연수원의 여성 비율이 40%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법관 비율은 여전히 약 20%밖에 안됩니다. [본문으로]
  2. 2) 성불평등과 고정된 성역할로 인해 고통을 받는 남성들도 많습니다. 올해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이었던 <헌팅 그라운드>는 학교 내 성희롱을 다루면서 이 사실을 잘 설명했습니다. 피해율이 아주 다르지만 많은 여성 성폭력 피해자가 사회의 편견(의상에 대한 비난, 전 성경험에 대한 물음 등)을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 성희롱 피해자는 항상 강해야 하다는, 참아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신고조차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차별은 여성에게 더 피해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남성이 겪는 문제 (예를 들어 감정 억압 등)와 여성이 겪는 문제 (외모의 과잉 중요시, 임금 차별 등)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