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에 앞서 인사말을 전하는 주성철 편집장(맨 왼쪽)>
쌀쌀한 여느 겨울날씨와 다를 바 없던 2017년 1월 16일 월요일. 가톨릭청년회관 바실리오홀은 수많은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꽉 채워졌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영화계 내 성폭력에 관한 긴급포럼이었다. 지난해부터 더욱 활발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 사안에 대해 한국여성민우회와 씨네21이 공동으로 포럼을 주최한 것이다. 포럼이 시작되기에 앞서, 씨네21 주성철 편집장이 인사말을 전했다. 그리고 포럼 자료집을 나누어주지 못하는 사정에 대해도 설명하였다. 여전히 법정에서 다투고 있는 A배우의 성추행 사건이 자료집에 담긴 까닭이었다.(이후 ‘A 사건’이라 함) 이렇듯 매우 민감한 이 A사건이 오늘 포럼의 주요한 내용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자료집을 참고할 수 없는 참석자들의 답답한 속내와 더불어 바실리오홀의 공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포럼 사회자인 윤태진 연세대 교수는 10차례 이상 씨네21의 한 꼭지를 채운 #영화계_내_성폭력 대담에 대해 언급하며 본 행사를 시작했다. 사회자의 말마따나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여러 인물과의 좌담을 연재한 씨네21을 통해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폭력 사례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영화 촬영과 같은 제작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수입, 배급, 홍보, 마케팅 등 영화관련 모든 영역에서 자행된 성폭력의 대상은 거의 대부분 여성영화인이었다는 점은 (비참하게도) 그다지 놀랄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사실 이번 포럼이 영화계, 나아가 우리 사회의 성폭력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성토하는 자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패널들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번 포럼을 단순하게 바라본 것이 민망해졌다. 동시에 그동안 영화계 내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미한 신음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첫번째 발제는 정하경주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이 맡았다. 먼저, 피고인을 고려하며 작성한 포럼 자료집이 배포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현재 항소심을 앞둔 A 사건에 대한 개요를 설명했다. 사건에 중심에 선 남배우, 여배우는 감독의 지시사항, 영화의 상영등급, 구체적인 연기내용 등에 서로 다르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배우는 15세 관람등급 영화의 가정폭력씬을 촬영하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상대배우의 돌발적인 스킨십과 거친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에 성폭력상담소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정하경주 소장은 지난달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핵심은 배우들 사이에 사전 합의없이 이러한 장면이 무리하게 촬영되었다는 것인데,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에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 정하경주 소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A사건을 배태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도 진단했다. 그것은 바로, 영화산업의 특수성이라는 허울좋은 핑계로 기본적인 일터의 윤리가 무시되는 점, 영화산업에서 성폭력이 자극적인 소재로서 소비되는 점 등이었다. 정하경주 소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연 이런 원인제공에 무고한가 자문해보았다.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없어 얼굴이 붉어졌다.
<첫번째 발제를 맡은 정하경주 소장(오른쪽)>
조인섭 변호사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판결문을 분석하면서 두번째 발제를 이어갔다. 판결문의 요지는 피고의 추행 사실은 인정되지만 고의는 아니며, 설령 고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업무의 연장으로 보아서 무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인섭 변호사는 남배우의 행동이 업무로 인한 행위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미필적 고의에 대해 지적했다. 또 메이킹필름에서 감독은 예정되지 않은 행동을 남배우에게 지시하였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여배우에게는 미리 공유되지 않은 점도 분명히 밝혔다. 조인섭 변호사는 당초 투자자가 영화의 상영등급을 19세이상 관람가로 감독에게 요구했고,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을까 여배우에게 15세이상 관람가의 휴먼드라마로 소개하고 섭외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조인섭 변호사는 법정 다툼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현장’이라는 영화제작환경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쉽게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가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영화촬영현장을 넘어 법정까지 퍼져있는 성폭력에 대한 편견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는 점도 절실히 느껴졌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 나누어준 홍보물>
세번째로 포럼을 이끈 손희정 젠더연구소 연구원은 성폭력과 여성혐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대상화’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한 철학자에 따르면, 여성 대상화는 여성을 도구로 인식, 자율성과 주체성의 거부, 활력이 없고, 소유와 대체가 가능하며, 언제라도 침범할 수 있고, 신체와 외모로 축소되며, 침묵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여성 대상화는 이번 A사건뿐만 아니라 영화계 전반에서도 발견된다고 손희정 연구원이 지적했다. 그리고 남성스태프들의 행동에 쿨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여성배우는 프로가 아니며, 큰 예산이 들어가는 프로젝트를 망치는 존재라고 낙인찍는 분위기 등을 예로 들었다. 한편으로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직접적인 폭력의 재현만을 고집하는 것은 제작진의 일천한 상상력을 드러냄과 동시에 배우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손희정 연구원은 성폭력사건이 종결되기 전까지 명예훼손이나 무고죄로 맞고소하지 못하는 법안에 대해 소개하며 대중적인 관심을 호소했다. 우리가 어떤 영화에 애정을 갖고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사안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가가 사회에 유의미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네번째 발제는 씨네21에서 일하는 이예지 기자가 맡았다. ‘합의없는 연기는 폭력이고, 그런 폭력이 담긴 것을 과연 영화라 할 수 있는가’라는 메시지로 운을 떼면서 영화촬영 중 발생하는 성폭력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갑작스러운 연기지시로 당황시키고 성폭력을 불러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합의되지 않은 노출을 요구하며 압박해오는 경우이다. 이예지 기자는 각각의 경우에 따른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였는데, 실제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모델 출신이니 노출이 부담 없을 것 같은데’라고 운을 떼며 사전에 얘기되지 않은 목욕탕신을 제안하는 따위의 황당한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역시나 그 대상은 여성배우였다. 이어서, 이언희 영화감독과 김꽃비 배우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감독과 배우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전달해주었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영화계 내 성폭력을 감독, 배우, 스태프 등 한 개인의 문제로 한정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기간 너무나도 흔하게 발생해온 영화현장에서의 성폭력의 구조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철저히 홀로된 개인들이 서로 생채기내며 고통을 주고받는 동안, 이를 묵과하는 다수 또는 거대한 카르텔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점에서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조 위원장의 발제는 다소 명쾌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계에서 어떤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일을 그르친(?) 한 사람만 남게 되는 현실을 짚어주었기 때문이다. ‘영화에 큰 돈이 들어갔으니 성폭력 등의 문제로 제동이 걸리면 안되고, 제작 완료와 흥행여부가 모두에게 더 중요한 것’이라는 식의 사고가 영화계에 만연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풍토에서 성폭력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영화인은 매우 드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다. 한편으로, 안병호 위원장은 보조출연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설문조사(2013)의 결과도 제시하였는데 결과가 꽤 충격적이었다. 응답자의 25% 정도가 성범죄 피해경험이 있었다라고 밝힌 것이다. 게다가 안병호 위원장은 영화산업 안에서 통용되는 근로계약서의 몇몇 부문을 읽어주었는데, 배우와 스태프 가릴 것 없이 근로기간과 근로조건이 모호하게 작성되는 것처럼 들렸다. 노동자로서 영화인의 사회적 기본권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현재 영화계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영화는 예술이 아니고, 노동이다’는 안병호 위원장의 당찬 발언과 영화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가 냉대받는 현실의 격차가 크게만 느껴졌다.
이날 포럼의 마지막은 예정에 없던 패널이 장식했다. 좌중에 있던 곽현화 영화배우가 테이블에 나와 최근 겪고 있는 소송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배우 곽현화씨의 노출씬이 포함된 무삭제판을 배포한 감독은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감독의 행동과 판결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는 역시 배우의 동의없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사실 필자는 이 날 포럼에서 곽현화씨 사건을 처음 들었는데, 이 정도면 당사자와 합의없이 일을 저지르고 보는 것이 영화계의 미덕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하지만 곽현화 배우는 본 사건외에도 자기를 더 고통스럽게 괴롭히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무책임한 사람들이 내밷는 가시돋힌 말이라는 것이다. ‘화보도 찍고, 다른 영화에서 이미 노출했는데 뭘 그리 문제를 삼느냐’는 식의 비아냥을 들을 때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릴 만큼 무력감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배우이기 전에 한 노동자로서, 한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모멸감을 감당하는 배우의 어깨가 매우 무거워보였다. 한 사람의 인격내지는 권리가 경시되는 한국 영화계, 한국 사회에 대한 실망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착잡한 순간이었다.
곽현화 배우의 발언이 일단락되고, 몇 차례 포럼참석자들의 질문과 패널의 대답이 포럼의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오고가는 대화속에서 성폭력은 여성혐오 또는 젠더 권력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되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 시작된 포럼은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정도 늦게 마쳤지만, 수많은 인파는 쉬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포럼시간에 비해, 더 나누어야 할 이야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포럼의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귀가길에 생뚱맞게도 ‘우리네 인생은 연기이고, 세계는 우리의 무대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라는 포럼의 제목을 나름대로 다시 해석해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연기를 하며 살아왔나, 나의 연기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지는 않았을까. 고개를 숙이며 반성하게 된다. 이번 포럼과 같이 성폭력 피해자들의 언어로 성폭력이 공론화되는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우리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성폭력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삶이 남길 희망하며.
<포럼에 참석한 이들로 붐비는 가톨릭청년회관 바실리오홀>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프로그램팀 이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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