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올해 ‘박남옥상’ 수상자로 <어른이 되면>(2018)의 장혜영 감독을 선정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박남옥 감독을 기리는 이 상의 의미는 동시대 여성 영화인들의 현실과 활동을 조명하고 돌아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정재은 선정위원장은 ‘박남옥 감독님이 살아계셨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를 질문하며 이번 수상자를 결정했다고 전해왔다. 이는 개인적인 문제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고 활동을 이어가는 삶의 모습을 아우르는 말일 것이다.
수상을 축하한다. 선정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나.
실감이 안 나더라. 사실 박남옥상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열심히 찾아봤다. 박남옥 감독님이 어떤 사람이고, 상이 어떤 의미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면서 기쁨이 훨씬 커졌다.
박남옥 감독은 <미망인>을 연출한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다. 그 이름을 딴 상을 수상하며 스스로 부과하는 의미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여성으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된 건 오래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무언가를 지키고 강하게 살아남는 건 주로 남성의 영역으로 이야기되는 부분이지 않나. 나도 어릴 때부터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를 소위 ‘명예남성’으로 생각했던 10대 시절이 있었다. 페미니즘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서 받는 박남옥상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여성 영화감독으로서 조명 받는 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임감이 크지만 그게 전혀 싫지 않다.
<어른이 되면>은 지난해 여성영화제 국내장편경쟁부문에서 상영됐다. 지난 1년간 어떻게 지냈나.
여전히 공동체 상영이 이어지고 있다. 포항과 목포에도 다녀왔다. 이제 슬슬 다음 작품을 하게 될 때가 오는 것 같다. 반면 장애등급제 폐지 등과 맞물리면서, 삶은 점점 더 투쟁의 영역으로 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다양한 관객과 만나고 대화하며 영화의 맥락을 확장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일화를 들려준다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하는 다양한 활동을 아우르는 목표의식과 관점이 <어른이 되면>이라는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 녹아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발달장애 전담 경찰관 제도라는 게 있다. 대구에 가서 그분들 앞에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 멀리오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선정위원들은 미디어 활동가이자 작가이며 가수로도 활동하는 장혜영 감독에게서,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내며 전진하는 새로운 세대의 여성감독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새로운 역할을 찾고 해내는 건 성취감도 있지만 피로감도 있는 일이다.
사실 지금의 피로감에 대해선 일부러 더 돌아보지 않으려는 게 있다. 지금은 돌아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생존을 위해 내달리고 있는 거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는 긴장감이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고 거기서 돌파구가 생기면 또 새로운 걸 하고. 그런 걸 봐주시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많은 동세대 창작자, 청년,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태도가 아닐까. 그래서 요새 느끼는 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의 중요함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넘어야 하는 산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타이밍에 상을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다. 힘들다는 얘길 하기도 전에 알아주시다니. 정말 큰 응원이다.
‘생각많은 둘째언니’라는 이름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영화 작업과 비교해 좀 더 빠른 호흡의 유연한 플랫폼이다.
유튜브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나답게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다운 템포를 유지하는 거다. 사실 유튜브는 채널이지 그 자체가 작품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러 오는 곳이고, 거기서 중요한 건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다. 소셜미디어에선 채널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훨씬 많이 하게 된다. 반응이 즉각적이기도 하고.
장혜영 감독의 다양한 작업은 개인에서 시작해 사회에 대해 질문하는 과정으로 향한다. 자연스레 여성, 소수자, 장애, 인권, 돌봄 등의 주제를 말하게 된다. 핵심을 전하면서도 말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내 작업의 근간은 언어다. 거기서 영상이 파생되기도 하고 음악으로 가기도 한다. 어쨌든 할 말이 없으면 표현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난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라, 내가 바라는 사람들의 반응이나 사회의 모습, 통과되길 바라는 제도가 굉장히 분명하다. 그런데 그걸 곧이곧대로 얘기하기보다는 그 앞에 많은 레이어를 두는 편인 건 맞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패가 있는 거지. 특히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이 있을수록 그렇다. 실제로 <손자병법>을 읽는다. (웃음) 정말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안 싸우고 이기는 게 최고라고 말하거든. 민주주의의 전투는 언어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언어를 벼리는 노력을 하는 것 같다.
박남옥 감독 역시 육상 선수였고, 기자가 되어 영화평을 썼으며, 자매 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해 자신의 영화를 스스로 제작하기도 했다.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여성 영화인에게 어려운 환경이 변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지만, 일종의 계보와 연결점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조적으로 연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어왔다고 생각한다. 오늘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건 아니니까. 오히려 그래서 지금 뭘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만약 박남옥 감독님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으면 분명 뭔가를 하실 텐데, 난 유튜브를 하실 거라고 생각한다. (웃음) 내가 어느 토대에 서있는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 같다. 이런 계기를 통해 그런 구조를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된다. 한국에서 여성으로서 영화하기 힘들다는 말에는 수많은 층이 있지 않나. 현장의 분위기에서 시작해 자원이 누구에게 가는가에 이르기까지. 그걸 혼자 바꿀 수는 없겠지만, 구조적으로 어떻게 해결 가능한지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미망인>이 당대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 그걸 간단히 규정하지 않았듯이, <어른이 되면> 또한 장애를 가진 성인 여성에 대한 사회적 서사를 ‘본질에서부터 파괴’한다.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과 이야기에 대한 열망 자체는 점점 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실천과 과제가 남아있을까.
일단 양적성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일이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은 여성성 자체를 무엇으로 규정할거냐는 문제로 넘어간 것 같다. 그것에 대해 여전히 답은 없고, 관객과 만드는 사람 사이의 긴장이 그 방향을 결정해 나가겠지. 사실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재현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 이를테면 <어른이 되면>에는 혜정이 화장하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그런데 그 장면을 고전적인 여성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평도 있더라. 재미있었다. 사실 그 장면들의 맥락이 다 다르다. 초반에는 혜정이 아직 시설에 살고 있을 때, 본인이 하지 않은 각설이 같은 화장도 나온다. 장애와 시설이 중첩되는 혜정의 삶에서 그 화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관객이 느낀다면,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또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거니까 그건 굉장히 좋은 것이기도 하고.
앞으로의 행보에 부담감도 책임감도 그리고 기대도 있을 것 같다. 다음 작업은 무엇인가. 어떤 이야기를 더 하고 싶나.
이제 다음 작품을 안 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다. (웃음) 상 탄다는 소리를 듣고 내년 봄쯤에는 찍어야지 싶더라. 발달장애인이 발달장애인으로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정확히 말하면 혜정이 픽션의 인물 중 하나로 나올 수 있는 작업방식을 시도하고 싶다. 꽉 짜인 각본이 아니라, 혜정이 뭘 하더라도 극 안에 녹아들 수 있는 상황을 만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걸 고민하는 것 자체가 도전적이고 재미있다. 허구의 인물들 속에 혜정이 그 자체로 들어간다면 그건 허구일까 리얼일까 그런 상상을 하는 거다. 그런 작업이 가능하다는 걸 한 번은 증명하고 싶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리버스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데일리는 영화전문웹진 리버스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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