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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데일리

[INTERVIEW] <나를 데려가줘> 에나 세니야르비치 감독

"여성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지?"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

에나 세니야르비츠 감독

주인공 알마는 이제 엄마가 고른 라일락 컬러의 옷을 입지 않는다. 무슨 색으로 채워질지 모를 순백의 티셔츠 한 장을 걸친 채, 그녀는 아빠가 있는 보스니아로 떠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국제장편경쟁작 <나를 데려가줘>는 동유럽에 대한 우리의 어두운 인식을 파스텔톤 스크린으로 밝게 물들인다. 그곳을 떠나거나 머무르고 싶어 하는 주변 인물 둘을 배치하며 영화는 남겨진 사람들사이의 갈등과 증오를 조망한다. 순탄치 않은 여행의 끝에서, 그녀가 택한 옷은 바다를 닮은 에메랄드빛 원피스. 자신만의 컬러로 물들어가는 알마의 옷은 미성년에서 여성이 되는 여정 그 자체였다. 에나 세니야르비치 감독을 만났다.

 

 

한국은 보스니아, 네덜란드와 물리적으로 매우 먼 곳에 있다. 이렇게 유럽 바깥, 아시아의 관객과 만나는 소감이 궁금하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오게 되어 매우 영광이다. 지난달에는 대만을 방문했었는데 이렇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선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나를 데려가줘>의 주제가 매우 보편적인 만큼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한 면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영화의 색감이 전체적으로 블루톤을 띄고 있다. 알마는 파란색 옷을 자주 입고 등장하다가, 중반부에 흰 옷을 여행용 가방에서 꺼내 입는다. 어떠한 의미를 담고자 했던 연출인지 궁금하다.

연출 의도는 당연히 있었다. 영화에서 색감은 아주 중요하다. 이 영화를 파스텔컬러로 표현한 이유는, 동유럽 하면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절망적이고 우울하고 어두운 인상을 많이 떠올린다. 다른 영화들에서도 그렇게 표현이 되고.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것을 반대로 뒤집은 새로운 방식으로 동유럽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밝은 톤과 자연을 비추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주인공 알마는 영화 안에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말이다. 이 영화는 알마가 여성이 되어가는 여정을 다룬다. 금발의 알마가 라일락 빛의 드레스를 입고 걸어 다닐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하게끔 의도했다. 주인공 알마의 옷과 스타일, 외적인 부분의 변화와 그녀의 정신적인 변화는 깊은 연관을 가진다.

 

<나를 데려가줘>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표정이 단조롭게 흘러간다. 이러한 표정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나?

인물들이 연기하는 표정보다는 기타 시네마틱한 요소로, 이를테면 카메라앵글 같은 것들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얼굴들이 단조로운 편이다. 'Brechtian'이라는 연기기법인데, 굳어지고 양식화된 연기를 피하기보다는 되레 그것을 스크린에 두드러지게 나타냄으로써 관객들이 아 저건 고착되고 양식화된 것이다라고 알아챌 수 있게 하는 연기 방법이다.

 

 

알마의 단조로웠던 표정이 마술쇼에 참여하면서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변한다. 영화 안에서 가장 큰 변화였던 것 같다.

후반부로 갈수록 알마는 허황된 세계에서 빠져나와 자연과 소통한다. 그 과정에서, 무미건조함으로 연기하던 알마의 모습도 무너져내린 것이다.

 

 

보스니아 내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이민자이면서, 지금은 네덜란드에 사는 여성이란 위치가 본인의 영화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물론 그 세 가지 위치를 포함해 나의 모든 백그라운드는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주제에 접근하는 관점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이번 영화는 동유럽과 서유럽을 연결하는 다리 같은 것으로 다른 두 지역을 함께 담아냈다. 내가 태어난 보스니아, 내가 자란 네덜란드는 모두 나의 고국(Home countries)이다. “보스니아 출신의 이민자 여성이라는 위치 덕분에 각기 다른 문제들을 볼 수 있었다.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긴장, 권력의 구조,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긴장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서유럽 네덜란드인 여성일 뿐만 아니라 발칸 사회의 배경을 가진 여성이기도 해서 사회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기반은 내 모든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는 나와 같은 배경을 가진 영화인이 많지 않다. 심지어 내 가족은 영화인이나 예술인도 아니었다. 그래서 영화 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치러야할 전쟁이 참 많았다. 특히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내가 가는 길이 잘 닦여 있다고 느끼지 못했었다. 내 길과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끝내 내가 영화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내 생각을 표현하고 감정을 그려낼 수 있는, 즉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진실은 상대적일 수 있다. 진실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에 따라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하지만 항상 남성의 시선으로 남성들이 이야기를 만든다. 나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여성 이민자로서의 삶) 성장해왔고, 용기를 얻었다. 더 용감하게 나만의 감정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한국에도 이민자 여성들이 영화를 직접 만드는 워크숍이 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영화인들이 늘어나는 것이 영화계에서 왜 중요하고, 또 스크린 바깥에서 어떤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의견을 묻고 싶다.

맞다. 관점의 다양화는 21세기의 중요한 논의점이다. 단일한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보단 더 많은 배경, 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프레임을 보여주는 게 내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은 모두 각각 개성과 특징이 있지만 평등한 존재이다. 예를 들면 소수자들은, 물론 여성 이민자도 포함해서, 해당 사회의 외부인이자 제 3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신선한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특히 유럽 내 몇 년간 이어지고 있는 난민 문제와 연결시킬 수 있다. 디지털 혁명을 통해 다양한 관점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인들은 다양성을 포괄하는 그림을 스크린에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지배에 관한, 굉장히 민감한 주제를 용기 있게 선택했다고 해서 빨리 다음 영화를 보고 싶은 기대가 크다. 한국도 식민지였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당신의 주제가 그렇게 먼 이야기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한국의 여성 관객들에게 다음 영화를 살짝 소개해달라.

다음 영화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했던 1900년대 초가 배경이다세계는 전쟁과 폭력으로 가득하다. 보통 폭력을 영화에서 그린다고 한다면 남성성과 연관돼서 얘기되지만, 나는 여성성과 폭력의 관계를 나타내고 싶다. 역사책을 들여다보면 남성의 기록 뿐이고, 그 마저도 남성에 의해 작성되지 않는가. 내가 상당히 관심 가지는 분야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중요한 이유도, 잊혔던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여성영화의 시초를 발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여성 영화인은 항상 존재했다. 기억되지 않았을 뿐이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항상 여성은 그동안 어디 있었지? 여성의 역할은 여기서 무엇이었지?”를 질문해왔다. 그래서 다음 영화는 식민화 아래에서의 여성의 경험과 무너져가는 체계 속에서 압제자 위치의 집단이 그 제도를 끝까지 고수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싶다. 전 작품 중 동유럽/서유럽의 성별 권력을 담은 영화가 있었는데, 그 이슈도 지속해서 만들어낼 계획이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25년을 살았지만 나 스스로, 이민자로서 던지는 질문이 언제나 있다. “내가 언제 이 사회에 제대로 적응을 해내서 이렇게 이들의 역사까지 얘기할 수 있는 자리에 오게 되었나?” 그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고 있다. 다음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 에나 세니야르비치 GV 현장 보기

* <나를 데려가줘> PREVIEW

 

[GV현장] 에나 세니야르비치 감독 <나를 데려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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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선채경 · 윤다은 자원활동가

사진  조아현

통역 김한얼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