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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데일리

[INTERVIEW] <자유노조의 잊혀진 전사들> 마르타 지도, 피오트르 슬리보브스키

"남성에게만 허락된 역사의 훈장"

감독 마르타 지도와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의 공동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터부시되는 것들을 향한 그들의 관심은 2010년 다운 증후군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시작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여성 영웅을 소환하는 <자유노조의 잊혀진 전사들>(2014)로 이어졌다. 연대(Solidarity)라고도 불리는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은 1980년대 공산주의 정권에 맞서 최초의 합법 노조를 조직하고 결국 폴란드에 민주화를 가져온 사건이다. 

 

그러나 이 기념비적인 승리의 역사에 여성들이 수행한 중요한 역할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들은 묻는다. 왜 그녀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을까. 왜 그녀들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사회‧정치 분야에 진출하지 못했는가. 여성의 자리는 사적인 공간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가부장적 사고가 그녀들을 배제했고, 스스로도 자신들의 업적을 낮추게 만들었다는 익숙한 대답을 길어 올리기 위해 그들은 긴 시간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들을 수소문하고 설득하여 화면 앞에 세웠다.

 

피오트르 슬리보브스키(좌), 마르타 지도(우)

 

<자유노조의 잊혀진 전사들>은 폴란드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관객이 보기에도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가려지고 지워졌던 여성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흐름이다.

마르타 지도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터부화된 주제에 관심이 있었다.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이 80년 그덴스크 조선소에서 시작됐고, 많은 조선소 노동자와 여성들이 거기에 참여했다. 그런데 폴란드 학교에서는 자유노조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폴란드 사람들조차 자유노조 운동이라고 하면 전 대통령인 레흐 바웬사만 떠올린다.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바웬사 스스로가 ‘내가 자유노조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는 현재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서 여성의 이름과 활동이 지워진 여파가 현재 폴란드의 젊은 여성들이 받는 차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중요하다.

 

피오트르 슬리보브스키

한국에서도 1987년 남성 중심의 중공업 단지에서 거세게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과 노동자의 이미지는 햇볕에 그을린 근육질의 남성 노동자였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노동문제에서의 여성 차별이 이 역사적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한 여성 연구자들에 의해 6,70년대 여성 중심의 경공업 사업장에서의 여성 노동 운동사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바 있다. 폴란드에서도 여성들이 중심이 되었던 사업장에서 노동 쟁의가 벌어진 역사가 있나?

마르타 지도  우츠(Łódź)의 여성들이 일하던 봉제공장에서 80년대에 투쟁이 있었다. 그 투쟁에는 아이들이 함께 나왔는데 여성들의 임금으로는 한 달 동안 아이들에게 필요한 식비도 충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배고픔의 행진’이라 부른다. 이 사건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책도 꽤 출간되었다.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폴란드는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경작지가 엄청나다. 그런데 배고파서 시위를 한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사실 2차 대전 이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사실상 소련의 영향 아래 있었다. 폴란드에서 나온 질 좋은 석탄, 철, 소, 돼지, 밀 등은 전부 소련에서 가져가고 폴란드 사람들은 소련에서 발급한 조그만 배급 카드로 배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레이터와 인터뷰어로 마르타 지도 감독 본인이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마르타 지도  일종의 진행자로 나를 설정했다. 나이 든 세대와 젊은 세대 중간에 위치한 연결자 역할을 하고자 했다. 젊은 세대는 같은 세대인 나에게 감정이입하여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에 접근할 수 있고, 나이 든 세대들 또한 나를 보면서 젊은 세대의 관점에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직접 화면에 등장하는 게 나로서는 매우 어려웠지만 피오트르가 강력히 추천했다.

<자유노조의 잊혀진 전사들>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보다 감정적으로 등장인물과 관객들을 이어줄 역할을 기대했다. 4년 동안 영화를 촬영하면서 그들의 개인적인 아픔과 고통을 들어야 했다. 인터뷰 허락을 받고 촬영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더라. 자신들은 영웅이 아니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면서, 직장과 아이들을 잃으면서까지 이 일에 투신했음에도 그저 당연한 일이라고만 말했다.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남성들만 훈장을 받았고 지금도 행사에 가면 박수 받으며 서로 악수를 나눈다. 그런데 다행히 완성된 영화를 보고 그들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관객들로부터 개인적인 감사 인사와 편지를 받고 나니 여성들도 자신들이 좀 대단한 일을 하긴 했나 생각하나 보더라.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1996년에 이탈리아로 이민을 가서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에바 오소프스카는 영화 첫 개봉 때 바르샤바로 찾아왔고, 그 후 아예 다시 폴란드로 돌아왔다.

 

마르타 지도  영화 제작에 4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또 하나의 이유는 에바의 경우처럼 인터뷰이들을 찾는 일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역사이기 때문에 도서관, 기록보관소를 수없이 다녔고 거기서 발견한 사진을 토대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인터뷰한 분이 다른 사람을 찾아가보라고 말해주고,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야기해주는 식으로 인터뷰이들을 만났다. 그들로부터 가장 중점적으로 듣고 싶었던 건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그들이 어떤 관점을 갖고 그 일에 참여했는지 말이다. 폴란드가 1989년에 민주화되고 나서 왜 정치, 사회 부문에 그들은 참여를 안 하고 가만히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자본주의 물결이 폴란드를 거세게 휩쓸었다. 영화 속 몇몇 인사들의 언급에서도 나타나듯이 이것이 폴란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에바 오소프스카 또한 폴란드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이탈리아로 떠났다고 했다. 자본주의화 이후 폴란드에서 여성들의 지위나 상태는 어떻게 변한 것 같은가?

마르타 지도  공산주의가 끝나고 1990년대가 됐을 때 여성들이 일하던 많은 공장에서 일자리가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됐다. 칠레로까지 이민을 갈 정도였다. 여기서 교수였던 사람들도 이민을 가면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청소부나 가정부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자본주의가 들어오던 초창기가 아주 혼란스러웠다. 아무런 규칙과 규제, 보호 장치가 없는 정말 무지막지한 자본주의였다. 실업급여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다. 완전히 쇼크였다.

 

마르타 지도  여성 인권의 측면에서도 자본주의화 이전에는 여성들이 출산 휴가를 길게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낙태도 합법적으로 가능했다. 지금은 이 모든 게 다 불가능하다.

 

마르타 지도

한국도 낙태금지법이 위헌판결 받은 지 얼마 안 됐다.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프로그레스! 폴란드에서는 카톨릭이 워낙 강하다. 행정부나 정치인 중에도 카톨릭 교회와 연결된 사람이 많아서 아마 완전히 바뀌긴 어려울 거다.

 

 

이번에 함께 상영된 <우먼 파워>(2018)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활약한 폴란드 최초의 페미니스트들을 다뤘다.

마르타 지도  <우먼 파워> 역시 숨겨진 여성 영웅들에 대한 관심이 이어진 영화다. 이 영화에 등장한 여성들 덕에 현재 폴란드 여성들이 교육도 받고 투표권도 가지고 있으며 일도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우리에겐 굉장히 인상적이고 감명 깊은 이야기였다.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이런 역사를 계속 알지 못한 채로 지나간다면 현재 폴란드의 상황은 점점 악화될 것이다.

 

 

둘의 공동 작업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

마르타 지도  15년 전에 TVP Kultura (폴란드 공영 TVP가 운영하는 TV 채널)에서 처음 같이 일했다. 우츠 영화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리포터로 활동할 때였다.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나도 리포터로 문화 관련 뉴스를 같이 진행했다. 그러다 2010년에 첫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다운 증후군을 다룬 영화였다.

 

<자유노조의 잊혀진 전사들>

앞으로 계속 숨겨진 여성 영웅들을 찾는 작업을 이어나갈 예정인가.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지금은 조금 버겁다. 너무 큰 책임감을 요하는 작업이다.

 

마르타 지도  <우먼 파워>가 작년 11월에 처음 개봉했기 때문에 다음 계획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마르타는 작가로도 활동 중인데 그녀가 올해 『Frajda』로 유럽 연합 문학상을 받았다. 아주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고 이번에 지원금을 받게 돼서 이 책을 영화화하기 위한 각본 작업 중에 있다.

 

마르타 지도  이 책에는 성(性)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 또한 폴란드에서는 터부시되는 소재다. 아무도 잘 건드리지 않았던 주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또한 이전의 우리 작업의 흐름과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피오트르 실리보프스키  『Frajda』 영화화에 필요한 기술 전문가가 한국에 있다. 다음에 이 작업 때문에 또 한국에 올 기회가 있을 것 같다.

 

 

글  김선명(리버스)

사진  구연주(핀치)

통역 김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