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레즈비언 소녀 빌리가 여학생만 다니는 보수적 교풍의 시골 카톨릭 학교로 전학을 온다. 등교 첫 날부터 작은 소동을 일으킨 빌리는 곧 모범생 엠마를 만나고 빌리와 엠마는 우여곡절 끝에 사랑에 빠진다. 필리핀에 사는 두 소녀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빌리와 엠마>는 틴에이저 멜로드라마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며 중반부까지 익숙한 패턴으로 전개된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소녀는 몇 가지 사건을 함께 겪으며, 상대에게 자연스럽게 이끌리고 그 과정에서 동성애를 향한 주위의 편견을 용감하게 돌파한다. 그렇게 두 소녀의 풋풋하고 설레는 연애 과정에 집중하며 흘러가는 것 같던 영화는, 중반 이후 임신과 낙태에 관한 질문을 꺼내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빌리와 엠마>는 동성애와 청소년 임신, 출산 그리고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는 카톨릭 이데올로기와 이에 의문을 던지는 학생들의 고민을 동시에 품고 있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관객에게 던진다. 또한 이 문제에는 학생이 부모와 교사로 대표되는 어른들의 교육과 보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청소년 인권의 맥락까지 녹아 있다. 이 영화에서 하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와 연결돼 있고 누군가에겐 옳은 대답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잘못된 대답이 된다. 이를테면 십대 소녀가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했을 때, 뱃속 아이의 아빠와 지금 연애 중인 상대, 부모, 교사, 수녀는 각자 다른 입장에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영화는 이런 주위 사람들의 입장을 주인공의 상황과 함께 균형 있게 다루면서 하나의 문제를 최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그 고민의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건 빌리와 엠마 뿐만이 아닐 것이다.
빌리와 엠마 Billie & Emma
퀴어 레인보우ㅣ사만다 리ㅣ필리핀ㅣ2018ㅣ107분ㅣ15세 이상ㅣDCPㅣ컬러ㅣ픽션
234 2019-08-31 | 21:00 - 22:47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513 2019-09-03 | 17:00 - 18:47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3관
글 김보년(리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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